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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 속의 활

기사승인 21-01-2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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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루, 해운대, 환선정, 관덕정 등에서 습사

진해루, 해운대, 환선정, 관덕정 등에서 습사

 충무공忠武公이 진중陣中에서 쓴 『난중일기』는 국보 제7호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전쟁 관련 기록이 많지만, 수군통제사로서의 공무, 나라에 대한 충성심, 모친에 대한 효심과 자녀를 향한 애틋한 사랑 등을 비롯하여, 그 시대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임진년(1592년)부터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하기 전인 무술년(1598년)까지 약 7년동안 썼다.

 『난중일기』는 원래 임진일기壬辰日記, 병신일기丙申日記, 정유일기丁酉日記 등 연도별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 충무공 사망 약 200년 후 충무공을 존경하던 正祖가 1795년(정조 19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붙인 것이다. 일기는 전쟁이 있거나 백의종군白衣從軍 기간 등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썼다. 일기는 날씨로 시작하여 공무수행 다음으로 활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활이 당시 전쟁에서 중요한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

 『난중일기』 속의 활쏘기를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전쟁 무기로서 활 둘째, 병사들의 활쏘기 장려를 위한 활쏘기 솔선수범, 편사를 통한 활쏘기 연마 셋째, 대화와 소통수단으로서 활쏘기, 활쏘기 후 술자리와 풍류로 나눌 수 있겠다. 

 활쏘기를 한 활터는 수군통제영 내의 활터(현 한산정), 인근 여수·순천 등에 있던 진해루鎭海樓, 해운대海雲臺, 환선정喚仙亭, 관덕정觀德亭 등이고, 활은 흑각궁黑角弓, 향각궁鄕角弓, 육략궁六兩弓 등이 나온다. 화살은 장전長箭, 편전片箭, 철전鐵箭, 화전火箭, 보통 화살 등을 사용했다. 특히 편전에 대한 얘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전쟁에서 편전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게한다. 실제 편전으로 왜군 적장을 쓰러뜨린 해전 일기를 글 뒤에 붙였다.

 충무공은 활쏘기를 잘 했다고 한다. 임진년 3월 28일의 일기를 보면 그 날은 10순을 쏘았는데 5순 몰기, 3순은 4중, 2순은 3중을 했다는 시수矢數 기록이 있다.  50矢 중에서 43中을 한 것이다. 자기 시수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이 날이 유일한데   특별히 시수가 좋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해전海戰에 관한 기록은 사천해전泗川海戰, 당포해전唐浦海戰, 명량해전鳴梁海戰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고, 한산대첩閑山大捷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전쟁 중 긴박한 상황이라 일기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난중일기』 속에 270회 이상 언급된 활 내용 전체를 살펴볼 수는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례를 중심으로 몇 가지씩 발췌하여 붙인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음력陰曆〕 
 1월 1일.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하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 번이나 설을 세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마사의 군관 이경신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장전과 편전 등 여러 물건을 바치다.

 2월 16일. 맑고 바람도 잤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해운대(여수 수정동)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는데, 꿩 사냥 구경에 빠져 매우 조용했다. 군관들은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이 詩를 읊었다.

 3월 6일 맑다. 아침에 군기를 점검하니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 등이 대부분 깨어지고 훼손되어 제 모양을 이루지 못한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아전과 궁장弓匠, 무기검열자(監考) 등을 논죄 하였다.

 3월 16일. 맑다. 순천부사가 환선정(순천시 조곡동 죽도봉공원내)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겸하여 활도 쏘았다.

 3월 28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몰기, 2순은 4중, 3순은 3중을 했다.

 4월 6일. 맑다. 진해루(여수 군자동 진남관터)로 나가 공무를 본 뒤에 군관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당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晴。出東軒公事後。射帿十五廵).

 4월 14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 맑다. 
 우수사가 오지 않아 홀로 제장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발진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가 와서 합류하였다. 적이 정박한 곳을 물었더니 사천泗川 선창에 있다 하여 곧바로 그곳에 이르렀는데 왜인들은 이미 상륙하여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산 아래에 전선을 줄지어 대놓았다. 거전拒戰이 매우 완강했는데, 나는 제장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돌진하게 하였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고(射矢如雨) 각 양의 총통을 쏘아대니, 그 대란이 폭풍 우레와 같았다. 적의 무리는 두려워하며 달아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인지 부지기수였다(逢箭者不知幾百數). 왜인의 수급을 많이 베었고 적선 십삼 척을 불살랐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을 맞았다. 나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했으나 중상에 이르진 않았다. 활꾼과 격군들이 탄환을 많이 맞았다.

 6월 2일. 당포해전唐浦海戰. 맑다. 
 아침에 발진하여 곧장 당포唐浦 앞 선창에 이르렀다.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있다. 둘러싸고 교전하였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 판옥선과 같았다. 배 위의 장루粧樓는 높이가 이 장丈쯤 되었고 누각 위에 왜인 장수가 위엄있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편전과 대, 중 승자 총통을 비처럼 난사했다. 왜인 장수가 화살을 맞고 추락하니 모든 왜군이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以片箭及大中勝字銃筒。如雨亂射。倭將中箭墜落 諸倭一時驚散). 모든 장졸들이 일시에 집중하여 쏘았다. 화살을 맞고 고꾸라지는 자가 부지기수였고(諸將卒一時攢射。逢箭顚仆者不知其數)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잠시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줄지어 바다로 나오다가 우리 군을 보고는 다투어 개도(介島)-통영 산양-로 들어갔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3월 15일. 맑다. 여러 장수들이 관덕정(여수 연등동에 터가 있다)에서 활을 쏘는데, 우리 편 장수들이 이긴 것이 66분分이다. 그래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하여 왔다. 저물녘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5월 5일. 맑다. ....(중략)우수사와 순천 부사, 광양 현감과 낙안 군수 등의 영공令公들과 같이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또한 군관 등을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했다.

 5월 30일. 종일 비. 원수사(원균)가 송응창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기에 병사의 공문을 통해 나누어 보내라고 하니, 그는 공문을 내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 하고 무리한 말만 많이 했다. 가소롭다. 명나라 신하가 보낸 불화살(火箭) 1,530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쓰려고 하니 그 잔꾀는 심히 다 말로 할 수가 없다....(중략)

〔갑오년甲午年, 1594년〕
 1월 26일.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순천부사가 기일을 어긴 것을 문책하고 공문을 작성 하였다....(중략)

 2월 5일. 맑다. ....(중략) 아침에 흑각궁 100개를 일일이 세어 서명하고 벚나무 껍질 89장도 셈하여 서명했다....(중략)

 4월 6일. 맑다. 별시別試 보는 과거科擧 시험장을 열었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사, 충청수사이고, 시험 감독관은 장흥 부사, 고성 현령, 삼가 현감, 웅천 현감으로 하여 시험 보는것을 감독하였다.

 4월 7일. 맑다. 일찍 모여 시험을 치뤘다.

 4월 9일. 맑다. 아침에 시험을 마치고 합격자 명단을 내붙였다....(중략)

〔을미년乙未年, 1595년〕
 7월 4일. 맑다. 이 전李 荃 등이 산 일터에서 만든 노 만들 나무를 가져와 바쳤다. 군관들이 활쏘기 시합을 하여 향각궁을 상으로 걸었는데 노윤발이 1등을 하여 차지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1월 29일. 종일 비. 일찍 식사를 한 뒤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오후에 활을 쏘았는데, 순찰사가 아홉 푼을 졌다. 김대복이 활쏘기에서 독보하였다. 피리 소리를 듣다가 삼경에 헤어져 진으로 돌아왔다. 저물 무렵에 사도에서 화약 훔친 자가 도주하였다.

 2월 16일. 맑다. 아침에 장계 초잡은 것을 수정하다. 저녁 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다. 장흥 부사, 우우후, 가리포 첨사가 와서  같이 활을 쏘다. 군관들은 지난날 승부 내기에서 진 편이 한턱냈는데 몹씨 취해 헤어지다.이날 밤은 너무 취해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새벽이 되다.

 6월 29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임.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무를 본 뒤에 조방장, 충청우후, 나주통판과 함께 철전, 편전, 활(帿)을 아울러 열여덟 순을 쏘았다. 

 7월 28일 맑다. ....(중략)늦게 충청 우후와 더불어 세 가지 화살로 쏘았다. 철전 36분, 편전 60분, 보통화살 26분으로 도합 122분이었다....(중략)

 8월 초3일. 맑다가 이따금 비. 지이(智伊)에게 새로 만든 활을 펴게 했다. 조방장과 충청우후가 와서 만나고 거기서 활을 쏘아 관통 시켰다. 아들들이 육량궁六兩弓을 쏘았다....(중략) 

〔정유년丁酉年,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鳴梁海戰. 맑다. 
 이른 아침 별망군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이 부지기수이며 곧바로 우리 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즉시 전 함대에 명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삼백삼십여 척이 우리 전 함대를 감쌌다. 제장들은 스스로 중과부적이라고 헤아려 거듭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櫓)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입한 뒤 지자, 현자, 각양의 총통을 폭풍 우레처럼 난사했고,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히 서서 화살을 비 오듯 난사했다(軍官等簇立船上、如雨亂射). 적의 무리는 당해내지 못하고 잠깐 다가오다 잠깐 물러나곤 하였는데, 우리를 수 겹으로 에워싼 탓에 전세를 예측할 수가 없었고 나와 같은 배의 병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며 말하였다."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대적할 순 없으니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적을 쏘라"제장들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나서 관망만 할 뿐 나오지 않았으며 배를 돌리고자 하는 눈치였다. 곧장 중군 김응함에 배에 댄 뒤 참수,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선두를 돌리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 배들이 차차 멀리 물러날 터이고, 적선이 점차 압박해와서 사세는 낭패가 될 터였다. 즉시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를 세우라고 명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니 중군장 겸 미조항(彌助項)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였다."안위야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네가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안위가 황망해 하며 적선 안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하였다."너는 중군(中軍)이 되어 멀리 피하기만 할 뿐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가 또한 급하니 일단은 공을 세우라"두 배가 교전의 틈으로 곧장 돌입하니 적장이 그 휘하 전선 세 척을 지휘하여 일시에 개미떼처럼 안위로 배로 달라붙었고 매달려서는 다투어 안위의 배로 올랐다. 안위와 안위 배 위의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여 거의 힘이 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배를 돌려 곧바로 돌입해 비 오듯 난사했고 적선 세 척을 남김없이 멸하였다. 여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속속 이르러 힘을 합쳐 적을 쏘았다(鹿島萬戶宋汝悰、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合力射賊). 항왜降倭 준사俊沙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그림 무늬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그 자를 선두 위로 끌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준사가 보곤 뛰면서 말하기를 "이 자가 마다시 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로 즉시 참수하게 하였고 이에 적의 사기가 대폭 꺾였다. 전 함대가 일시에 쩌렁쩌렁 북을 치면서 일제히 전진했고 각 지자, 현자 총통을 쏘아대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니(各放地玄字射矢如雨)그 소리가 강산을 진동하게 하였다. 적선 삼십 척을 쳐부수자 적 함대가 물러나 달아났으며 다시는 감히 우리 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하늘이 준 행운 이었다. 水勢가 극히 험하고 아군의 세력도 지쳐 위태로웠으므로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임진왜란을 격은 선조는 국민의 상무정신尙武情神을 키우고 군사력을 강화코자 경복궁 안에 오운정五雲亭을 세워 민간에게 개방했다. 활쏘기를 장려하여 활쏘기가 백성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무과시험을 자주 시행하여 많은 민간사정이 생겨나므로 활쏘기가 백성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참고 서적 '난중일기(이은상 옮김, 지식공작소. 2014)', '(쉽게 보는)난중일기(노승석 옮김, 도서출판 여해. 2014)', '난중일기(송찬섭 엮음, 서해문집. 2015)'이다.

양희선(서울 화랑정)

국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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