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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활 솜씨

기사승인 21-02-2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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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더함을 받고, 교만은 덜어냄을 부른다

 영조는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 사도세자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왕위를 손자에게 물려주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문무를 함께 갖춘 보기 드문 개혁 군주였다. 규장각奎章閣을 통해 정약용과 같은 인재를 등용했고, 장용영壯勇營을 세워 무신들을 가까이 두고 무예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에서 수원 화성을 건설하고, 능행陵幸을 위해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놓았다. 채제공과 같은 훌륭한 재상을 두고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잠재우고자 힘썼으나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볼 때 정조는 신궁으로 불릴 만큼 조선의 역대 임금 중 활을 가장 잘 쏘았다. 열 순 50발 중 49중을 하고 마지막 한 발은 손을 거두어 쏘지 않거나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활쏘기는 참으로 군자의 경쟁이니, 군자는 남보다 더 앞서려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는 것도 기필期必하지 않는다”고 했다. 겸양의 미덕을 보이고 신하들의 체면을 세워주는 경영의 지혜이기도 하다.

 정조가 1792년(임자년) 10월 30일 오재순의 '고풍古風'에 손수 쓴 글에서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태조 이래 태종, 세조 등이 활쏘기를 잘 했다는 집안의 전통)인데 이후 10여 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 힘을 시험해 보려고 10순씩 몇 차례 쏘았는데 40여 발씩 명중시켰다고 자랑했다. 그랬더니 경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때 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고 했다. 유엽전柳葉箭은 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화살로 무과시험 등에 쓰였다. 1792년 당시 정조의 나이는 41세로 열두 차례나 49중을 했다고 한다.

[고풍 검교제학판중추부사 오재순. 
사진: 경향신문 갈무리]

 정조가 오재순의 '고풍' 중 하반부에 써준 어필御筆 내용도 그 날짜 『정조실록』과 같다. 신하가 임금이 쏜 화살의 점수를 자세하게 적은 '고풍'지를 먼저 올리면, 때로는 위와 같이 그 '고풍'에 임금의 느낀 바를 쓰기도 했다. 어필에 나온 선물은 …문방 용구 등을 제신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전에 했던 말을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시경』에 ‘덕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 바로 그 뜻이다”라 했고, 끝에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맨 왼쪽에 ‘반숙마半熟馬(웬만큼 길들인 말)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규장각 관리들에게도 반숙마 1필씩을 하사했다. 정조는 참석자 중 맨머리에 있던 오재순에게 특별히 임금의 소감문을 써준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 어진〕 

정조가 같은 해 12월 19일 활쏘기에 같이 갔던 오재순에게 전약煎藥(쇠가죽을 고아서 만든, 동짓冬至날에 먹는 음식의 한가지)을 ‘고풍’으로 내려준 것을 하나 더 붙인다. 장혁掌革(손바닥 크기의 가죽)을 정곡으로 쓴 것이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조가 오재순에게 전약을 고풍으로 내려준 문서 [煎藥 古風] 

 규장각 신하들은 임금께서 활을 쏘시고 여러 차례 고풍을 내린 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현판을 탁본한 서첩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을 만들어,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다. 동시대의 실학자 박제가가 남긴 『어사기御射記』로 정조대왕의 활쏘기 일화를 마무리한다. 십여 년 전 조선일보에 실렸던 글이다.

 정조의 활 솜씨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어사기(御射記)'를 읽었다. 정조(正祖)가 1792년 10월과 11월에 쏜 활쏘기 기록을 적은 글이다. 정조는 보통 한 번에 10순(巡)을 쏘았는데, 1순은 화살 5대이다. 과녁 안을 맞히면 1점, 과녁 중앙의 정곡(正鵠)을 맞히면 2점으로 계산해서 정조는 보통 70점 이상 80점을 맞히었다. 과녁을 벗어난 화살은 한 대도 없었다. 어느 날은 20순을 쏘아 153점을 얻기도 했다. 대단한 활 솜씨다.​

자신의 점수가 계속 향상되자 정조는 정곡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 가며 연습의 강도를 높였다. 접부채나 곤장에 종이를 붙여 정곡으로 삼기도 했다. 장혁(掌革) 즉 손바닥 크기의 가죽이나 그보다 작은 베조각을 정곡으로 삼아 연달아 다섯 대를 맞힌 일도 있다.​

정조는 늘 50대의 화살에서 마지막 한 대는 쏘지 않은 채 활쏘기를 마쳤다. 왜 쏘지 않았을까? 제왕으로서 겸양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한 대를 아껴 끝까지 가는 대신 여운으로 남겨둔 것이다. '상서(尙書)'에서 "겸손은 더함을 받고, 교만은 덜어냄을 부른다(謙受益, 滿招損)"고 한 말이 바로 이 뜻이다.

기록이 월등히 우수한 날, 왕은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문방구 등의 상품을 내려주었다. 신하들은 글을 올려 감사를 표했다. 임금은 '시경'의 한 구절을 들어 저마다 직분에 힘을 쏟아 상 없이도 나라의 기강이 굳게 세워져서 임금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기를 바라노라는 덕담을 내렸다. 국왕의 활쏘기 자리는 늘 이렇게 임금과 신하 사이에 백성을 향한 마음을 다지는 다짐으로 끝맺었다. 성대(聖代)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신하들은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서 벽에 걸어, 임금이 신하를 아끼는 마음과 이 거룩한 조정에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신 영광을 기념했다.
[출처] 정민의 세설신어 [27] 정조의 활 솜씨|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조선일보 2009.11.25)

〔박제가의 어사기에 언급된 장혁(掌革) 정곡(正鵠)의 고풍.부천활박물관〕

〔참고 자료〕활을 쏘다(김형국. 2011), 경향신문(2019.02.06.) (이기환 기자)의 글

양희선(서울 화랑정)


국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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