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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활터, 금호정기 金虎亭記

기사승인 21-09-1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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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액에 담긴 당시 한량들의 시대적 가치관...

전통활터, 금호정기 金虎亭記
편액에 담긴 당시 한량들의 시대적 가치관...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전통활터 금호정기를 소개한다. 기문에는 당시에 활을 쏘던 선진 사우들의 활쏘기를 대하는 인식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오늘 날에도 금호정기에 담겨진 활쏘기의 담론은 유효하다. 전국한량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편집자주】
 


금호정기 편액

 

金虎亭記

射有道 始於正己 中於反求 終於觀德 學射者 先學射禮 尊敬師友 揖讓言行 遵守規範 操弓立壇 先敬其身 敬對的堠 凝神注視 莊重姿勢 不顧 不喧 不動 不撓 自頭至足 四肢百軆 悉遵師友之教導 修得弓軆 以勉正己工夫 發而不中則不怨不怒 沈着雍容 反省求索自己之誤點 悔改精進軆得妙理 以勉反求工夫 此二件工夫 習之化之 長養德性則應用於千萬事物 無處不當 可見其成德矣 孔子所謂正己而發 發而不中 反求諸己 以觀德行 正以此也 今之射者 徒以軆育之一具 會而射之 戰禍板蕩以後 此亦掃如耳 孔友先文 湍北有志也 與林友成奉 志同趣合 避禍南渡 僑寓是鄉 邁進健闘於公私之再建 近日慨然 射道之不振與 若干同志 鼓舞奬勵 首先喜捨 起三間射亭於水踰峴上 鄕中新進 蔚然興起 吾鄕射道 從此其庶幾矣 惟頭射友諸彦 學其禮 修其藝 行其道 養其德 使吾鄕黨 觀德行於吾儕則幸甚耳 惟我韓國弓道 古典花郎精神 依據繼續進行 庚戌以後 國内外寇侵入 多年間 波難重疊 慇然幣止 去壬戌年間 吾鄕武士先輩諸位 協議亭號金虎 未成射閣 至于今日 乃以舊名揭之 古人誤以岩石為虎 專精力射之沒羽 今吾儕倍精力 以射之則錐金塊 為虎 可以沒羽矣 此亭金虎之名 盖以此矣

檀紀四二八九年九月 日
射末 李時榮 謹識


금호정기

활쏘기에는 법도가 있으니, 정기(正己)에서 시작하여 반구(反求)를 거쳐, 관덕(觀德)으로 이루어진다. 활을 배우는 자는 먼저 사례(射禮)를 배우고 나서 스승과 벗을 존경하며, 예를 다하여 말하고 행동하며 활터의 규범을 준수한다.

활을 잡고 단(壇)에 서면, 먼저 자신의 몸을 경건히 하고, 과녁을 마주함에 있어서는 정신을 집중하여 응시하고, 장중한 자세로 돌아보지도 말고, 떠들지도 말 것이며 움직이거나 흔들거리지도 말아야 하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지와 온몸을 모두 스승과 벗의 가르침을 따라서 궁체를 얻기 위해 수련하는 정기공부(正己工夫)에 힘써야 한다. 쏘아서 맞지 않으면 원망하거나 성내지 않으며 침착하고 온화한 태도를 견지하여 자기의 잘못된 점을 구하여 찾아 반성하며, 뉘우치고 바로잡아 활쏘기의 묘리를 체득하기 위해 정진하는 반구공부(反求工夫)에 힘쓴다. 

이 두 가지 공부를 익히고 자연스럽게 되어 오래도록 덕성(德性)을 길러낸다면 천만 사물의 이치에 응용하여 부당하게 처할 바가 없게 되니 그가 이루어낸 덕성을 볼 수가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이른 바, ‘자신을 바루고 나서 쏘고, 쏘아서 적중하지 않으면 그 원인을 돌이켜 자신에게서 찾아 그 덕행을 본다.’ 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활쏘기는 한갓 체육의 한 종목으로 여기고 모여서 쏘기만 할 뿐이었는데, 전쟁의 참화로 나라가 어지러워진 이후로는 이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나의 벗 공선문(孔先文)은 단북(湍北)1) 의 유지요, 벗 임성봉(林成奉)과 더불어 뜻과 취미를 같이 하였다. 화를 피하여 남쪽으로 건너와 이 고장에 머물러 살게 되면서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재건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매진하여왔다. 

오늘날 사도(射道)가 떨쳐 일어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몇몇의 동지들을 북돋우고 장려하면서 맨 먼저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수유현(水踰峴)2) 위에 세 칸짜리 사정을 세우니, 고장의 젊은이들이 울연히 흥기하였다. 우리 고장의 사도(射道)는 그 대강이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오직 중요하게 여긴 것은 사우(射友)들과 여러 선비들이 활쏘기의 예를 배우고 사예(射藝)를 수련했으며 그 도를 행하여 왔고 그 덕을 기르는데 있었다. 만약 이 고장 사람들이 우리들에게서 활쏘기의 덕행을 볼 수 있다면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다.

우리 한국의 궁도는 예로부터 화랑정신을 본받아 이에 따라 계속 나아왔으나, 경술년(1910) 이후로는 나라 안팎에 도적들의 침입이 다년간 이어져 파란이 거듭되니 활쏘기는 은연중에 폐하여 그치고 말았다. 지난 임술년(1922) 무렵 우리 고장의 무사 선배들이 협의하여 사정의 이름을 금호(金虎)라 짓고, 사각(射閣)3) 은 이루지 못하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완성하고 옛 이름을 현판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은 바윗돌을 호랑이로 오인하고 오로지 힘을 정밀히 하여 쏜즉 깃이 묻힐 정도였다 하니, 이제 우리들도 곱절의 노력으로 힘을 정밀히 하여 쏜다면 쇳덩이라도 뚫을 것이니 호랑이를 잡아도 화살 깃이 파묻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정을 금호(金虎)라 명명한 것은 대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단기 4289년(1956) 9월
사말(射末) 이시영(李時榮)은 삼가 쓰다.

국역: 윤백일(군산 진남정) 21. 6. 4.
 


1957년 최학주 고문 송별기념
처마 밑에 金虎亭(금호정) 편액이 선명하다

 

(주) 위 기사에 사용된 사진은 2014년 영집궁시박물관의 특별전 '활터 이야기-금호정'의 자료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주석】
1)단북(湍北) : 물가의 북쪽. 파주 지방의 강이나 하천을 이르는 듯함.
2)수유현(水踰峴) : 수유고개. 파주 지방에 속해있던 옛 동네 이름인지, 금호정이 세워질 당시의 위치가 천변 건너의 고개를 말하는 것인지 확인이 어렵다. 
3)사각(射閣) : 사정 건물을 말함. 사정(射亭)말고도 사각(射閣)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archerynews@gmail.com

국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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