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고전, ‘활 민족의 역사’ 묻고 살 것인가?

기사승인 21-08-01 10:16

공유
default_news_ad1

임정에서 활쏘기를 하다

‘활 민족의 역사’ 묻고 살 것인가?
 
들어가며 
고구려 벽화의 수렵도를 보고 가슴이 띄지 않고 생경하게 느끼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이유는 오랫동안 활은 우리 민족과 가장 어울리는 무기로서 가장 잘 다루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주몽(주르멘,주몬)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하며, 태조 이성계 역시 명궁으로 조선을 개국하였다. 이는 활은 당시 첨단 무기이며 이를 잘 다루지 않고서는 민심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림픽 대회의 양궁 및 사격 등에서도 이를 알 수 있으며 어느 고을에 가더라도 사정(射亭)을 두어 지역의 예절(禮節) 및 체육 증진의 장으로 한 축을 담당했고 어느 민족도 따라오지 못할 기술의 경지를 우리 민족이 이루었음은 자타공인 하는 바이다. 우리 고장은 조선조에 연산현으로 두마와 신도안을 아울러 불리워졌다. 두마면 왕대리 김대감 집에서 시작한 연산 백중놀이를 비롯하여 찬란한 유학의 꽃을 여기에서 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에는 지역사회를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삼물(三物)이라 했는데 곧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례(六藝)이 있었다.(周禮 大司徒 참조) 그 중에서 육례(六藝)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는데, 예학의 종장이신 사계 김장생 선생께서 연산(임리)에 낙행하셨는데도 아직까지 누구도 연산 지역에서 육례의 한 부분인 활쏘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 예학의 고장이라는 말을 공허하게 하였으며 논산의 브랜드인 ‘禮스민’을 뒷받침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에  연산지역에 활터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유교문화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고자 이 글을 쓴다.
 
본론
사계선생께서 늘그막이 벼슬을 버리고 임리에 내려오시어 전대에 최씨 집안의 땅(雅閑亭)을 전란으로 소실된 자리에 양성당(養性堂)을 만드시고 양성당기(養性堂記)를 쓰시고 당시 교류하던 인사들에게 글을 구하여 편액을 걸었는데 그 중에서 활터에 관련된 시를 적고자 한다.
 
우선 진산 소광진(晉山 蘇光震)이 갑진년(1604년) 가을에 지은 시 양성당십영(養性堂十詠) 중에서 ‘임정관덕’ (林亭觀德)를 소개한다
 
 林亭觀德 임정에서 활쏘기를 하다
진산 소광진 (晉山 蘇光震)
 
日暖風殘時 일난풍잔시
날은 따스하고 바람 멈춘 때에
 
全村亭上聚 전촌정상취
온 마을 사람들이 정자위에 모였네
 
從容不主皮 종용불주피 
각자 편안하게 가죽 과녁 뚫기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人道其爭古 인도기쟁고
사람이 활 쏘는 다툼이 옛적의 도와 같구다 
 
이 시로 연산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따스한 봄날 임정에 모여 활쏘기 대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임정의 터가 상당하게 컸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1629년에 집안사람 용계 김지남이 쓴 양성당십영(養性堂十詠) 중에서 ‘임정관덕’을 소개한다
 
林亭觀德 임정에서 활쏘기를 하다
용계 김지남 (龍溪 金止男)
 
林皐展席午陰淸 림고전석오음청 
임정 언덕에 자리 펴고 한낮 그늘이 맑은데
 
風定帿安鼓屢鳴 풍정후안고루명 
바람 멎고 과녁 안정한데 북소리 여러 번 울렸네
 
滿酌罰觥人共醉 만작벌굉인공취 
가득 부은 벌주에 사람들 모두 취했으니 
 
莫言君子本無爭 막언군자본무쟁
‘군자는 본래 다툼이 없다’는 옛말은 하지도 마오
 
위 시는 진산 소광진(晉山 蘇光震)이 쓴 시보다 25년 후인 1629년(崇禎 二年)에 쓰여졌다.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임정 언덕에서 활 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승패의 결과에 따라 벌주를 함께 술을 나누어 마시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이것이 일회성 활쏘기 행사가 아니고 30년 가까이 계속 진행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앞으로 관련된 자료가 더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며 제현들께 연구를 촉구하는 바이다
 
우리나라에서 남아있는 사정은 명궁이신 정조대왕시기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수만은 활터가 있는데 이번에 이야기하는 임정(林亭)은 1600년대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활은 우리 민족의 상징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기록 문화가 이렇게 부족함을 보면 배달 후손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으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답이 여기에 있다고 확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지역마다 사정(射亭)이 있으나 개개의 사정(射亭)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1820년대 재건된 강경 덕유정(德遊亭)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안다. 이유는 수많은 난리와 일제침략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소실되었으며, 격동의 세월은 우리 자산을 뒤 돌아보는데 시간을 주지 않았고, 산업화와 세계화라는 용광로로 우리의 등을 떠미는 것도 모르고 바쁘게 살아냈기 때문이다. 이제 한숨 돌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니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갈 길이 멀구나.
 
이러한 공감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400년 전의 선비들의 눈을 통해 연산지역의 사정(射亭)인 임정(林亭)의 모습을 발굴하여 보임에 의미를 두고 싶다.
 
덕유정 사원 김태호 씀

국궁신문

<저작권자 국궁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