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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시 전천 箭川-화살 내 -

기사승인 21-10-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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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동해시의 대표 하천

동해시 전천 箭川-화살 내 -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동해시의 대표 하천
 
 전천은 우리말로 ‘화살 내’로  임진왜란의 아픈 역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태백산맥 주봉의 하나인 두타산(1,352m)에 비가 내리면 동쪽으로는 경사가 심해 동해로 빠져나가고, 서쪽으로는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되어 한반도의 젖줄로  흐른다. 동해시 전천은 삼척시의 오십천, 강릉시의 남대천 등과 같이 지역을 가로질러 동해로 흐르며 땅을 비옥하게 하고, 그 지역과 역사를 같이한다. 이번에는 무릉계곡, 두타산성, 허제비, 마고할미, 파소굼이 등 유별난 이름이 등장하는 전천의 내력을 살펴본다.
 
  명나라 정벌 길을 내 달라는 왜의 터무니 없는 요구를 조선이 거절하자, 왜군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임진년(1592년, 선조25) 조선 땅을 침입했다. 전국에서 나라를 지키기기 위해 많은 의병이 일어났고, 삼척지방 의병은 두타산성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함락당하고, 수많은 화살은 장맛비에 쓸려 내를 따라 떠내려 왔다. 왜군들이 휩쓸고간 국토 어느곳이나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천의 내력은 처절하다. 
 
 『동해학』(동해문화원. 2018)에 실린 내용이다. 
 “···두타산성에 얽힌 전설도 많다. 임진왜란 때 왜장 길성(吉城)과 중융(重隆)이 이끄는 부대가 삼척읍을 분탕한 후 백복령을 넘어 정선으로 갈 때 삼척의 의병들과 피난민들이 이 산성에 모여 있었다. 적은 그것을 알고 무릉계곡을 향하여 침공하였으나 우리 측에서는 남북 험준한 절벽에 줄을 띄워 허제비 장수가 줄을 타고 오락가락하는 위장전술로 적을 퇴각시켰다. 그러나 냇가에서 빨래하던 ‘마고(麻姑)할미’의 제보로 왜군은 이기령(耳基嶺)을 넘어 중봉에서, 즉 성 후면에서 침입하여 산성은 함락되었으나 피차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는 전설이 삼화사지(三和寺誌)에 실려있다. 또한 이 전투로 사상자의 피가 냇물을 따라 흘러내려가다 적에게 정보를 제공한 ‘마고할미’의 빨래터에 모여 붉게 물들어 원한의 소沼가 되었다 하여 ‘파소굼이’라 한다. 현재 삼화리와 신흥리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류하는 곳이 바로 ‘파소’인데 수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크고 깊은 소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자갈로 메위지고 없다. 또한 이 전투에서 사용되었던 많은 화살이 내를 따라 흘러갔다 하여 지금 북평(北坪)으로 흐르는 내를 ‘살천’ 혹은 ‘전천(箭川)’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전설은 오랜 세월을 따라 이 지방 사람들이 전해 내려오는 비통한 전설이지만 그것이 비록 임진왜란 때 생긴 전설만이 아닌 것 같다. 먼 옛날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수많은 전쟁을 이 두타산성에서 하였으리라 짐작되거니와 고려 말에 수많은 왜구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이곳 주민들은 이 산성에서 생존의 승부를 걸었으리라 생각될 때 두타산성은 국방수호의 유서 깊은 곳이라 하겠다.”
 

동해시의 대표하천-전천
 
 이 글을 토대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삼척지역에 침입한 시기와 경로 및 의병활동 등을 『척주지陟州誌』, 『삼척군지』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엮어본다. 
 
 왜군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임진년 4월14일부터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약 15만5천명의 군사를 9개 부대로 편성하여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을 분담하였다. 강원도는 제4번대 모리 요시나리(모리길성毛利吉成)가 강원감사 자리를 배당받고 쳐들어 왔다. 약 1만4천명의 왜병이 한성에서 강원도로 우회하여 철원⟶김화⟶춘천⟶간성⟶양양⟶강릉⟶삼척(⟷울진)⟶정선⟶평창⟶영월⟶제천⟶원주 경로를 거쳐, 같은 해 8월25일 원주의 강원감영을 점령하였다. 왜군 제1번대는 고니시 유기나카(소서행장)가 평안도를, 제2번대는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함경도를 나누어 분담하고, 제1번대부터 모두 한성의 관문인 문경새재를 넘어 한성으로 들어왔다. 
 
 삼척지역에 침입한 4번대는 왜군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고, 약 3~4천명의 왜병이  7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 약 20일간 머물며 약탈과 분탕질을 했다. 삼척을 점령한 왜군은 시게타카(중융重隆)가 군사를 나누어 평해로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당시 울진 왕피천 옆 성류굴에 피난 가 있던 주민 수 백 명이 몰살당했다고 구전되고 있다.  8월초에 다시 합류한 왜군이 두타산성을 함락하고 백복령을 넘어 정선을 거쳐 평창에 도착한 날짜가 8월7일이다.『호구일록虎口日錄 참조』 음력으로 이 시기는 초가을로 비가 많이 내리고 태풍이 오는 시기이다. 두타산성 전투로 흘린 피와 쌓여있던 많은 화살이 늘어난 냇물에 휩쓸려 떠내려 왔으리라. 
 
 당시 삼척부사는 기령奇笭이었으나 왜군의 삼척 점령기간중 기령과 관군의 역할에 대한 기록은 없다. 2년이 지난 후『조선왕조실록』에는 “···왕년에 적이 강원도에서 삼척과 울진 사이로 흩어져 나가니, 국토를 지키는 신하들이 모두 도망쳐버리고 하나도 막은 자가 없었으므로 적이 평해를 지나 영해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었으니.『선조 27년(1594) 11월5일』”란 기록이 남아 있다.
          
 『척주지(삼척부사 허목. 1662)』,『삼화사지(1847)』에는 왜군이 지역에서 분탕질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송라정松羅亭(현 동해시 송정동)에 사는 최언기崔彦璣의 딸이 있었다. 약혼만 하고 아직 혼례는 올리지 않고 있었다. 강릉을 함락시킨 왜군은 7월에 삼척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때 주민들은 산속으로 모두 피신했으나 왜군의 작폐는 심했다. 가족과 함께 산속으로 피신한 최언기의 딸 최랑崔娘은 왜군에게 붙잡혔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가엽게 여겨 죽은 최랑을 장사 지내주고 순결한 그의 주검을 기리기 위하여 길가에 열녀각을 세웠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 후 1661년 삼척부사로 온 허목은 그의 슬픈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송라(松蘿)의 열녀(烈女)에 대한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다.〔허목. 기언 제37권. 척주기사陟州記事〕
이 열녀각은 동해항 개발로 1986년 천곡동 냉천(찬물내기) 소공원으로 이전되어,「處女 烈女崔氏之碑 처녀 열녀최씨지비」로 세워졌다. 
 
열녀최씨지비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을 남북으로 끼고있는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계곡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계곡 넓은 곳은 남북15리(약5.6km)다. 젊은 의병들이 계곡 양편 언덕에 줄을 띄워 허수아비(초우신장草偶神將, 일명 허제비)를 여럿 걸어놓고 양편으로 오가게 하면서 멀리서 왜군들이 보면 많은 군대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이 부근을 ‘허공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무릉계곡 입구의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642년)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두타산성의 축조는 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기라 한다. 둘레의 길이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척주지』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약 4km를 조금 넘는다.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많은 의병과 백성들이 피난하였으나, 왜군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고 사람들이 학살 당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피가 계곡물을 붉게 물들이며 흘렀다고 한다. 
 전천은 임란 이전에는 북천 또는 북평천으로 불렀다. 태백산맥의 백복령에서 유입되는 신흥천과 두타산, 청옥산, 고적대에서 유입되는 무릉천이 삼화동에서 합류하는데 이곳을 피소(血沼) 또는 파소巴沼라고 했고, 파소 아래쪽을 전천이라 불렀다. 물길은 뒷뜰을 가로지르며 구미리와 송정리(현 북평동과 송정동) 사이를 지나 만경대萬景臺 아래에 이르러 동해로 흘러간다. 태백산맥 동쪽의 넓은 유역면적에서 모인 물이 사시사철 흐르며 수량이 풍부해 전천강이라 부르기도 했다.
 
 삼국시대 삼척지역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로 두 나라가 번갈아 지배하였으며, 신라의 지배기간이 길어 신라 문화권에 가깝다. 이런 지역 여건으로 전쟁이 잦았고,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당시 전투로 인해 파소의 전설이 생겼다고도 한다.
 동해시는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합쳐 생겼다. 북평읍은 전천강 하류에 생성된 삼각주를 중심으로 생겨난 비옥한 들판에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삼척부三陟府 북쪽에 있다고해서, 북평北坪(뒤뜰) 또는 후평後坪이라 불렀다.(삼척향토지. 1955. 58쪽) 삼척부내에서 최대의 평야였다.(삼척군지. 1988. 669쪽) 
 전천과 전천강, 뒷뜰이란 지명은 이 지역 학교 교가에 나오는 익숙한 이름이다. 북평 초등학교 교가 ...‘전천’의 물고기는 서로 뛰놀며 창공의 백합대는 ..., 
북평 중·고등학교 교가 ...광활한 ‘뒷뜰’ 서북 ...‘전천강’ 평화롭게 동해로 흐르는 곳 이상의 꽃 피오리... 교가를 생각하다 보니 철부지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 두타산성 전투 결과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다.
 
△척주지. ···왜구가 침입하여 성을 함락 시키고는 성안을 도살屠殺하였다고 한다. (국역 척주지. 153쪽. 배재홍 편저. 2001)
△문화유적총람(문공부 문화재관리국. 1977) 462쪽···임란시 3일간 격전 끝에 마구할머니가 요새의 비밀 통로를 적에게 누설 함락되었다 한다. 인근에 ‘피수구비’, ‘바굴다리’, ‘대구리’ 등 지명地名, 동명洞名, 교명橋名 등이 격전의 흔적으로 전해오고 있다.
△삼척군지(1984). ···성 후면에서 침입하여 산성은 함락되었으나 피차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두타산성 표석(1986).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이 산성에 모였고 의병장 최원흘(崔元屹)을 중심으로한 젊은 의병들이 이 성을 공격하는 왜적을 맞아 용감히 싸워 왜병을 전멸시킨 싸움터다.
     
두타산성 / 두타산성 표석
 
 이상의 전투 결과를 요약하면 ‘도살 당했다.’ ‘피차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왜병을 전멸 시켰다.’ 세 가지이다. 결과를 단정하기 전에 다음 몇 가지를 고려해 보면, 지리적 여건은 의병들이 유리했으나 무기는 크게 열세였다. 왜병은 조총을, 의병은 활, 칼, 쇠스랑, 도끼 등으로 상대했을 것이다. 수적으로도 3천명 수준의 왜병에 비해 열세였고, 군사훈련은 병사와 농민 수준으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차이가 났을 것이다. 전쟁사는 각자 자기편 입장에서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왜병들을 전멸 시켰다는 기록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두타산성 전투 후 왜병이 후방에 기세 등등한 의병을 남겨 두고,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을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원주의 강원감영을 점령하였다는, 주변 기록도 참고할만하다. 두타산성 전투 기록은 70년이 지난 후세의 『척주지』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남아 있어, 전설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다만 무기중에 활은 유력한 무기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활은 먼거리 적을 공격할 수 있으므로 수성守城에 좋은 무기였고, 두타산에는 활을 만들기에 알맞은 뽕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1660~1662)의 글을 모은 척주기사(陟州記事)에 실려있는 글이다. 
 
“태백산과 두타산 동쪽에 기이한 뽕나무가 나는데, 활 만드는 재목으로는 알맞으나 양잠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잎의 크기는 손바닥만 하고 열매의 크기는 3치이니,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동해의 세 치 오디〔東海三寸椹〕’라는 것이 이것이다.”〔한국고전종합DB의 허목, 「기언記言」제37권〈척주기사〉‘기이奇異를 기록하다’참조〕
 화살은 두타산에 흔한 싸리나무를 썼을 것이므로, 전천의 화살(箭)은 싸리나무 화살(楛矢,호시) 이었을 것이다.
 
 최원흘은 1572년(선조 5) 4월10일 삼척에서 부친 최극강과 모친 영양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약관의 나이로 두타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디지털삼척문화대전』 
 
⮗ 임진왜란 때에 생긴 지명과 말
 
△파소굼이. ··· 전사한 의병들의 피(血)와 화살이 내를 따라 흘러내려 이곳 소沼에 맴돌아 붉게 물들였다 하여 피소(血沼)라 하는데···『삼척군지. 1988. 683~684쪽』이곳을 혈소, 피수구비 또는 적두연赤豆淵으로 부르기도 한다.
△바굴다리. 북평교의 속칭이다. 바구리는 조선 인조 때 삼척부사 이준李埈이 전천을 경계로 뒷두루(뒷뜰)를 둘로 나누어 북쪽은 북평리, 남쪽은 박곡리(璞谷里)로 정한 데서 비롯된다. 박곡리가 바구리로 변하고, 바구리에 있는 다리는 바굴다리가 된 것이다.『동해시지명지(2017. 132~133쪽)』, 『삼척군지(1988. 665쪽)』
△대구리. 구전口傳으로 두타산성 전투 사망자들의 머리(대가리)가 물길에 휩쓸려  동네 앞으로 떠내려 왔다고 생긴 이름이라 한다.
△비이총(鼻耳塚). 삼척지역을 침략한 제4번대는 왜군들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백성들의 코와 귀를 많이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가, 전리품으로 삼았다고 한다. 임란 이후 일본 교토에 조선인 12만6천명의 코무덤인 비이총이 생겼다. 
△에비야가 잡아간다. 우리말 가운데 어린이들 울면‘에비야가 잡아간다’말이 있는데 왜란 때 이비야(耳鼻爺)란 말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쾌지나 칭칭 나네. 우리 민요의 후렴구로 널리 알려져 있는‘쾌지나 칭칭 나네’의 어원은 ‘쾌재라(快哉-). 가등청정이 쫓겨 나가네’란 말이 부르기 편하게 줄어든 것이다.
 
 현재 전천변에는 활터 두 개가 있다. 상류에 두타정, 하류에 초록정이 있다. 이 밖에 동덕정을 포함하여 동해시 한량들은 전천과 역사를 같이하며, 활쏘기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을씨년스러운(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을사년乙巳年스럽다’는 말이 생겨 ‘을씨년스럽다’로 변했다.) 사연이 깃든 전천의 내력이 전통 활쏘기 역사의 가치를 더해간다.
 
〔도움을 주신분〕
오종식 동해문화원장
홍경표 전 동해문화원장
〔참고문헌〕
삼척지역의 임진전쟁사 연구(2020년도 임진란사 학술대회 발표문. 삼척시)
 
양희선(서울 화랑정)

국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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