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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북일기(扶北日記)-30순 몰기 기록!
기사입력 2010-06-16 오전 8:55:00 | 최종수정 2010-06-16 08:55   
2002-09-24

부북일기는 울산 출신 박계숙, 박취문 부자가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변방지역에 1년간 부방하였을 때를 당하여 써놓은 일기이다.

박계숙의 일기는 선조 38년(1605)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會寧 甫乙下鎭에서의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선조 40년 1월 1일까지의 일기이다. 그리고 박취문의 일기는 인조 22년(1644) 12월 9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會寧府와 鏡城의 兵營에서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인조 24년 4월 4일까지의 일기이다.

박계숙과 취문 부자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본관은 울산으로 라말여초 울산지역의 유력한 토호였던 朴允雄의 후예였다. 그 후 별 뚜렷한 현조가 없이 내려오던 그의 가문이 향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아버지 弘春에 이르러서였다고 보여지는데,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는 언양 기장 현감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계숙도 아버지와 더불어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사실은 그의 가문이 울산지역에서 유력 가문으로 발돋음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박계숙(1569년(선조 2) ∼ 1646년(인조 24))이 무과에 급제한 것은 선조 27년으로 임진왜란 중이던 26세 때였고, 일당백장사에 선발되어 부방길에 오른 것은 10여년 후인 선조 38년 37세 때의 일이었다. 그후 그는 宣傳官 訓練院 副正의 관직을 거쳤다.

박취문(1617년(광해군 9) ∼ 1690년(숙종 16))은 인조 22년 그의 나이 28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그 해 겨울 新出身 자격으로 부방하였다. 그후 그는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의 虞侯, 훈련원 부정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 인동 갑산 김해 등지의 수령도 역임하였다. 결국 이들 가계는 홍춘, 계숙, 취문 3대에 걸쳐 내리 무과에 급제함으로써 무반으로서의 기반을 굳혔다고 하겠다.

부북일기의 사료적인 가치로는, 먼저 경상도 울산에서 함경도 회령에 이르는 歷程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교통 실태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변경지역의 부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일기라는 점에서 변방지역의 軍務 실상과 변방에서의 출신군관들의 생활상을 잘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신들이 남긴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할 때 출신 내지 무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부북일기가 궁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일기문에 있는 당시 군관들의 활쏘기 실력에 관한 기록 때문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면 박취문은 하루 30순을 쏘아서 150발 모두를 맞추었다는 엄청난 궁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또한 대부분의 군관들도 50발중 40발 이상의 명중률을 갖추고 있었다. 간추려진 부북일기를 소개해 본다-[편집자주]

다음은 부북일기의 내용들을 간추려 보았다.

선조 16년 이탕개난이후 무과에 급제한 출신들은 급제한 직후 1년간 변방에서 부방하는 것이 의무였다. 부방하는 출신군관들은 거주지 도의 병사로부터 지정된 장소에서 점고를 받았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목적지 병사로부터 최종 점고를 받은 후 근무지를 배정받았다.
부방하는 출신군관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단체로 함께 이동하였는데, 군관 한 사람당 최소한 노복 1명, 타는 말 한 필, 짐 실는 말 한필이 기본이었으니, 이동할 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행로시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숙식이었다. 숙박처로는 官衙나 驛舍 등도 많이 이용되었지만 그 보다는 私家가 더 많이 이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급은 곳에 따라 원활하게 해결되지 않아 애로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 출신군관들은 노복과 말을 거느렸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 울산에서 회령까지 이동하는데 걸린 기간은 대개 70여일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근무지를 배정받은 출신군관들은 병영에서 다양한 일을 담당하였다.
정식 직책을 맡아 일정기간 지속적인 업무를 관장하기도 하였고, 한시적이고 일회적인 업무를 담당한 경우도 있었다. 병방군관이나 공방감관 등에 임명되어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전자의 예가 되겠다. 후자의 예로는 상관을 배종하는 업무를 맡거나 또는 병영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업무를 맡아서 수행한 것 등이 해당되겠다. 그리고 때로는 상관의 명으로 대리로 과거시험을 치루는 등 부정한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출신군관에게 있어 변방에서의 부방생활은 위험 부담도 큰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몇가지 반대급부도 있었다.
부방한 기일은 후일 관직에 나아갔을 경우 경력에 포함되어졌으며, 얼마되지는 않았겠지만 일정한 급료도 매월 지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관직에 나아가기 전에 군무를 익힐 수 있는 실습의 장이기도 했으며, 나아가 관직에 제수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같은 군관이라도 출신군관은 토착군관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출신군관들은 대개 양반들이었을 뿐아니라 정해진 일정 기간을 복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처지였다는 점에서 토착군관들과는 구별되었다. 이에 출신군관들 스스로도 토착군관과는 차별화된 존재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부류 사이에는 가끔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함경도 병영에서는 두만강이 얼어붙는 동절기가 역시 가장 조심해야 되는 비상 시기였음을 부북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상급관서의 순찰이 대개 동절기에 집중되어 있었던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평상시에는 경성의 병영에 머물던 북병사도 동절기에는 두만강변의 행영에 전진 배치되어 적침에 대비하였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군관들은 병영에서 활쏘기를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군관들에게 있어 弓射는 그 자체가 군사 훈련이었고, 체력 단련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오락이나 시합의 수단이기도 하는 등 다목적의 효용성이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군관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하거나 활쏘기 시합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활쏘기 시합은 자체 내 군관들끼리 편을 갈라 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인근 지역과의 원정 경기를 펼치기도 하였다.
활은 10巡 단위로 쏘았는데, 하루에 10巡 즉 50발을 쏘는 것이 상례였으나 20순, 30순을 쏜 경우도 많았다. 주인공인 박계숙과 취문 부자는 모두 뛰어난 명사수였는데, 특히 취문의 실력은 신궁의 경지에 가까워 30순 즉 150발을 연속 명중시킨 때도 있었다. 대체로 볼 때 시합에 참여한 군관들의 경우 50발 중에 최소한 40발 이상을 명중시키는 실력을 보유하였다.
활쏘기는 편을 갈라 단체로 시합을 했을지라도 결국은 개인의 기록이 드러나는 경기였기 때문에 제일 잘 쏜 사람이나 50발을 명중시킨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 격려를 하였으며, 반면에 진 편의 꼴찌에게는 여러 가지 종류의 벌칙을 가해 기롱한 것이 상례였었다.

출신군관들의 변방에서의 일상생활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취문의 경우 부방길에 많은 여인들과 동침한 사실을 적기해 놓았는데, 그 대상은 대개 기생이었고, 더러는 숙박한 주인집의 家婢도 있었다.
그리고 근무지에 도착해서는 房直을 한 명씩 배정받아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방직은 대개 官妓나 私婢 중에서 충당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과부가 된 私婢를 강제로 방직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妓일 경우에 房直妓라 하였고, 婢일 경우에 房婢라 표현하였다.
요컨대 방직은 군관들의 객지생활의 여러 가지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존재였던 것이다.

한편 선물도 비교적 자주 주고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종류는 곡물류와 반찬류가 대부분인 가운데 소금, 땔감, 술, 가죽 등도 있었다. 평상시 선물의 규모는 대구 몇 마리, 콩 한 말, 땔감 한 짐 등 정을 표시한 간단한 것이 많았다.
다만 이별시에 받은 선물은 평상시보다는 규모가 조금 크거나 별난 물건들이었다. 또 변방에서 무인들끼리의 크고 작은 잔치가 열렸을 때 흥을 돋우는 방법으로는 詩作보다는 唱歌가 많이 불려졌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령급의 전별연은 약 한달전부터 환송연과 답례 형식으로 수차에 걸쳐 이루어졌음도 알 수 있었다.

그 외 놀이로는 바둑과 쌍육이 주로 행하여졌다는 점, 편지 안부는 대개 한 달에 한 번 꼴로 서울가는 인편이 있을 때 부쳤다는 점, 석탄을 병영 차원에서 채굴하여 쌓아두고 사용하였다는 사실, 강우량을 재는 단위로 호미와 보습을 이용한 단위가 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료출처> 울산전문대학교 우인수교수 논문집 중에서
:: http://www.icantour.co.kr/tour2/tour2_5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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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전체 1   아이디 작성일
30순 연몰기는 대단 한 실력 kh587 2010.08.25
이었나 봄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사거리였다면 현재로서는 신문에 날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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