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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矢紙) 문화의 재발견
우승자에게 주는 시지 풍습은 우리나라만 존재
기사입력 2019-07-31 오전 9:02:00 | 최종수정 2019-11-27 오전 9:02:15   

시지(矢紙) 문화의 재발견

화랑정 김기훈

  2012년 8월 정읍 필야정의 시지가 등록문화재로 확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을 전후한 기록으로서 국궁 기록 양식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역사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국궁계도 경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료가 어떻게 보관되고 있는지, 그 자료가 국궁의 역사를 아는데 어떤 기여를 하였는지 잘 알려 진 바가 없다. 등록 자료가 되었다고 하여 금방 그 자료가 연구되고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자가 있어야 하고, 적절한 지원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연구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기에 조급하게 어떤 성과를 당장 바라지는 않지만, 어떻게 활용될 것이라는 계획이나 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필자는 금년 초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전후의 시지 몇 장을 접한 적이 있었다. 오늘 날의  서울시 성동구 상왕십리 부근(당시 고양군)에 있었던 무학정이 자체 편사를 하고 그 결과를 적어 놓은 시지였다. 그동안 무학정의 이름은 들은 바 있지만,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사정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손에 잡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바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한지 조각에 적힌 편사 사원들의 이름과 각자의 시수, 각 편의 성적을 합산한 기록 등을 보는 순간 활을 내면서 시수에 따라 환호작약하는 무학정 사원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함성이 들려오는듯 하였다. 더 이상 무학정은 이름만 존재하는 사정이 아니었다. 살아 움직이는 활터가 되었다. 이 시지를 보관하고 있는 분은 무학정 자정 편사에서 장원을 하여 이 시지를 받았던 분의 손자다. 삼대가 이 시지를 보관하고 있는 셈이니, 그야말로 가보로 간직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오래 보관된 시지가 실로 국궁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원임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몇 장 안 되는 시지 쪽지가 뜻밖에도 편사 경기의 형태, 기록의 형식, 당시 활꾼들의 시수, 그리고 장원에게 시지를 주는 풍습 등 다시 말하면 1920년대 국궁 문화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였기 때문이다.

  기록 문화는 아마도 조선 왕조를 능가하는 나라가 별로 없을 것이다. 주요한 행사의 과정이나 결과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기록하였다. 궁중 활쏘기 행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도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 시대에 만들어졌던 <대사례 의궤>에는 행사 과정은 물론 참여하였던 신하들이 좌궁인지 우궁인지, 그리고 시수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다 적어 놓고 있다. 명궁으로도 잘 알려진 정조는 궁중 활쏘기 자료도 가장 많이 남겨 놓았다. 정조의 활쏘기 기록은 262건에 달한다. 많은 건수가 고풍(古風)이라는 문서의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연사례를 준비하면서 남긴 기록인 <연사례 습의>에는 성적 기록인 시기(試記)는 많은 정보를 남기고 있다. 참여한 측근 문무관들의 관직과 성명, 삼순의 성적이 모두 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사용한 과녁은 곰을 비롯한 9개의 동물을 그린 과녁인 구후(九帿)였고, 맞힌 동물그림에 따라 1점에서 3점까지 다르게 점수를 부여하는 채점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새롭고도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런 활쏘기 기록의 문화와 전통은 궁중만이 아니었다. 수많이 시행되었던 무과시험이나 군사 훈련 시에도 기록은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 흔적은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등에 병조가 훈련이나 시험의 결과를 왕에게 보고한 내용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불기 시작한 놀이 활쏘기 즉 편사는 이렇게 기록 문화에 익숙한 관리들이나 한량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공적인 기록 문화의 유산은 자연스럽게 사적인 놀이 즉 편사 경기에도 반영되었다. 대회의 목적에 따라 약간씩 그 방식은 다르지만 정확하고 공정하게 성적이 기록되었다.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시지(試紙 혹은 矢紙) 문화이다. 어느 나라나 성적 기록의 전통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시합의 방식과 채점 방식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기록 양식이 다른 것은 시지 문화가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특성을 지님을 말해 준다. 그런데 시지를 우승자나 우승 단체에게 주는 풍습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장원에게 시지를 수여하는 이런 독특한 풍습은 시지를 오늘날의 우승컵과 같은 최고 명예의 상징으로 간주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활터와 활꾼들의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해 주는 시지가 최근에 서효행 명궁에 의해 국궁신문에 대량 기증되었다. 뛰어난 실력으로 장원이 되어야만 받을 수 있었던 시지를 기증한 것은 이 원로 여무사님의 기억이 이제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공유된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기억이 이제는 집단의 기억이 되었다. 이 기억의 자료들을 더듬어 가면서 우리 국궁 현대사의 미세한 부분들을 구성해 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동안 잠자코 한 켠에 묻혀 있었던 시지들이 후배들에게 발견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 국궁 문화의 정체성을 담보해 주는 또 하나의 길이 시지 문화의 재발견에 있음을 다 같이 생각해 볼 때이다.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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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공 : 국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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