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쏘는 화살(心矢)------
현소리의 경쾌함
앞을 못 보는 소경이 계십니다.
활터에 놀러왔습니다.
궁사들은 활을 냅니다.
궁사가 활을 낼적마다 소경님이 한마디씩 합니다.
음, 현소리 좋고....!
아니여, 아니여, 현소리가 그게 아니여....!
과녁에 맞는 소리가 중요한게 아니더라구요.
현소리가 좋아야지요.
과녁에 맞고 안맞고를 떠나
현소리의 경쾌함을 듣고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생각하시는 소경님.
연작시인 ‘활터의 소경님’이 작성된 시기는 정확하진 않지만 2003년 전후로 기억된다. 국궁신문 서버와 솔류션 변경에 따른 일부 데이터 손실이 발생하여 보관중인 오프라인 국궁신문 백업 데이터 하드에서 찾아낸 자료이다. 파일명이 ‘활터의 소경님’으로 압축되어 풀어보니 12편의 주옥같은 시(詩)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연작시를 작성한 한량은 누군지 모른다. 다만 당시에 국궁신문 게시판 글을 올리면서 ‘참선궁’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연작시에는 활터의 일상을 간결한 필체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20여년 전에 작성되었지만 다시 읽어봐도 감동이 스민다. 코로나19로 어수선한 활터에서 잠시 시위를 놓고 강독하기를 권해본다.【武士內外】
활터의 소경님-【1】
앞을 못 보는 소경이 계십니다.
활터에 놀러왔습니다.
궁사들은 활을 냅니다.
궁사가 활을 낼적마다 소경님이 한마디씩 합니다.
음, 현소리 좋고....!
아니여, 아니여, 현소리가 그게 아니여....!
과녁에 맞는 소리가 중요한게 아니더라구요.
현소리가 좋아야지요.
과녁에 맞고 안맞고를 떠나
현소리의 경쾌함을 듣고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생각하시는 소경님.
많은 것을 배웁니다.
활터의 소경님-【2】
아름다운 화살
오늘도 그 소경님을 만났습니다.
사대 뒷자리에 앉아
활내는 궁사들의 시위 소리를 감상하셨습니다.
오늘은 아무런 말씀을 안하시기에
여쭤보았습니다.
"현소리가 어떠신지요?"
아무런 말씀을 안하시더군요.
가만히 눈감고 고개만 끄덕끄덕.
"오늘 현소리는 어떠셨는지요?"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하시는 말씀,
"아름다웠다네.
깜깜한 어둠을 뚫고 쌔-앵 날아가는 화살이
정말 아름답고, 황홀하게 보였다네.
촉에 부딯쳐 흩어지는 바람도 아름다웠고,
허공에 춤추듯 나부끼는 꿩털도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그 어떤 고난도 단번에 뚫어버릴듯한
힘이 실린 화살대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네."
활터의 소경님-【3】
가끔씩 활터에 나오시는 소경님.
늘 사대 뒷자리에 앉아
활 내는 궁사들을 바라보신다.
말 없이 앉아 계시다
일어나 그냥 가신다.
"앞이 안보이시면 답답하시죠?
그래도 다행이시네요.
귀는 들을 수 있으시니깐."
"그건, 자네 마음이고,
난 때로
귀마저 안들렸으면 하는 때가 있다네."
활터의 소경님-【4】
활터 주변에 코스모스가 피었다.
몇 가닥 웃자란 꽃대에,
하얗게 발갛게 연분홍으로도.
화살 주우러 오가는 길목
온 몸으로 끄덕끄덕 아는체 한다.
소경님도 이 풍경을
아시기나 할까.
활터의 소경님-【5】
하늘은 파란데 햇빛은 뜨겁다.
바람도 한점 없다.
빨리 해가져서 어두워지길 바란다.
서늘한 저녁나절을 상상하면서.
"저 햇빛 좀 가릴 수 없나.
숨이 커억 막히고 너무 덥네."
"이 사람아,
저 햇빛이 자넬 살리고 있는거여."
그 분 말씀이다.
활터의 소경님-【6】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나절 활터.
작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앉아,
부침개에 소주를 나눠 마신다.
이따금 부는 바람도 좋은 안주감.
소경님의 화살 얘기에 귀를 세운다.
때가 묻은 화살(濁矢)도 있고,
깨끗한 화살(淸矢)도 있다.
악한 화살(惡矢)도 있고
착한 화살(善矢)도 있다.
난잡한 화살(難矢)도 있고
고요한 화살(靜矢)도 있다.
욕심이 가득한 화살(貪矢)도 있고
비어있는 화살(空矢)도 있다.
삿된 화살(邪矢)도 있고
올바른 화살(正矢)도 있다.
교만한 화살(慢矢)도 있고,
겸손한 화살(兼矢)도 있다.
잔인한 화살(殘矢)도 있고,
인자한 화살(仁矢)도 있다.
생각이 많은 화살(有念矢)도 있고,
생각이 없는 화살(無念矢)도 있다.
몸으로 쏘는 화살(身矢)도 있고,
마음으로 쏘는 화살(心矢)도 있다.
조급한 화살(急矢)도 있고,
느긋한 화살(晩矢)도 있다.
"또, 찾아 보시게.
자네의 화살은 어떠하신가?"
활터의 소경님-【7】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화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화살이 뭔 줄 아는가?
입으로 쏜 못된 화살(口矢)이라네.
상대의 가슴에 오래오래 박혀
두고두고 괴로움을 준다네.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한 발만 쏴도
수만발의 화살이 되기도 하지.
때로는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한다네.
시간이 가도 그 화살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죽어서도 구업(口業)이 되어 괴롭힌다네.
쏜 사람이나
맞은 사람이나
다 같이 괴롭다네.
곁에서 보고있는 사람도
괴로운게
구시(口矢)라네.
활터의 소경님-【8】
파란 하늘의 한 귀퉁이가
붉은 노을로 아름답게 물들어 간다.
활터의 궁사들
과녁 보랴, 하늘 보랴.
이따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반쯤 걷어 올린 팔둑,
매서운 눈빛,
안에서 뿜어 나오는 감춰진 힘.
사대에 그 기운 가득하다.
"오늘따라 모두들
뭔 힘을 그리 쓴당가.
가슴 답답혀서 못 보겄구만."
그 분 말씀이다.
활터의 소경님-【9】
사대에 선 궁사들 눈은 세개다.
두 눈은 앞을 보고
한 눈은 뒤를 본다.
귀도 세개다.
두 귀는 앞소릴 듣고
한 귀는 뒷소릴 듣는다.
입도 두개다.
한 입은 바른말 하고
한 입은 그른말 한다.
아무리 습사무언이라도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할말 다 한다.
소경님은
눈귀입이 몇개인지 알수가 없다.
보는지 안보는지 알수도 없고
듣는지 안 듣는지 알수도 없다.
그래도 알건 다 아시고
할말은 꼭 하신다.
활터의 소경님-【10】
화살 주우러 오가는 길에
개미가 많다.
어떤 궁사는 무심코 지나간다.
어떤 궁사는 피하며 지나간다.
어떤 궁사는 밟으며 지나간다.
"길바닥 개미를 함부로 밟지 마시게.
나쁜 기운이 묻는다네."
활터의 소경님-【11】
신사만 보면 입이 근질근질한 구사가 한명 있다.
사대에서 활 낼때도
자꾸 고개돌려 신사를 본다.
사대뒤의 신사는
활 당기는 연습하느라
입 꾹 다물고, 줌손은 덜덜덜.
활터의 소경님,
구사 한번 쳐다보고
신사 한번 쳐다 보고
활터의 소경님-【마지막】
그 날도 무심코 활터에 갔다.
사대의 궁사들 여늬때와 다름없다.
날이 어둑어둑 해진다.
상복입은 사람이
하얀 종이로 덮은 쟁반을 들고 온다.
그 뒤에 술을 든 사람도 있다.
처음 본 얼굴들이다.
웬 떡이며 과일이며 술인가?
소경님의 손자, 손녀란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내가 죽거던 꼭 활터에 한상 보내라"하셨다고 한다.
활을 접고 문상을 갔다.
영정에 분향 재배하고 다시 그 모습을 뵈오니
인자한 웃음은 허-연 수염과 잘 어울리고
예리한 빛의 형형한 두 눈.
우린 할말을 잃고 돌아섰다.
지금도 활터에 가면
그 분의 흔적이 역역하다.
【후기】
제가 그 분을 만난 것은 2002년 7월쯤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게 2002년 11월 초 쯤이고요. 거의 매일 활터에 오셨습니다. 집이 바로 활터 옆이었지요. 지팡이를 들고, 하얀 모시옷, 하얀 양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오셨습니다. 매우 잘 생기셨습니다. 키도 크시고, 넓적한 얼굴,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 호탕한 목소리... 늘, 조용하게 오시어 활 내는 것 보시다가 조용하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난청이셨지요. 실제로 저는 그 분을 만났으며, 그 분한테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까지의 글은 그 분께서 저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더 많은 가르침이 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룰랍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선궁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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