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자료 | 한국의 활터 | 국궁밴드
자유게시 | 벼룩시장 | 국궁사이트

포럼 역사 문화 사법 탐방 대회 활터 세계 책/웹 심곡재
2021.04.12 (월요일)
역사고서유물
 
전체보기
역사
고서
유물
 
 
뉴스 홈 역사 역사 기사목록
 
다산 정약용의 활쏘기
북영벌사기와 홍절도어사각궁기
기사입력 2020-11-17 오후 9:14:00 | 최종수정 2021-02-03 오후 9:14:41   
 다산茶山은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문신으로 정조의 남자라고 불린다.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로 실학의 집대성, 목민심서 집필, 수원 화성 건설, 한강 배다리 설계 등 그의 업적은 어설픈 글 솜씨로 표현하기 어렵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1 에 남긴 그의 활에 관한 편린片鱗 두 가지를 살펴본다.

 정조는 신하들 중에 젊고 재능 있는 문신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위탁교육을 시켜 인재를 양성했다.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라고 불렀다. 규장각은 원래 도서관과 같은 곳이 었으나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권력의 핵심기관으로 키운 곳이다. 교육과목은 사서삼경四書三經*2 이고 정조가 한달에 한번 직접 강의하고(親講) 직접 시험을 치룰(親試) 정도로 공을 드린 곳이다. 

 1789년(정조 13년) 이후 1800년(정조 24년)까지 10여 년은 다산의 전성기였다. 규장각의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젊은 문신으로서 학문의 깊이를 더 했고, 과학기술 등 신문명에 관심을 가지고 백성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했다. 다산이 농민을 위한 정치ㆍ경제 개혁안을 구상ㆍ발표한 것은 33세 때 암행어사로서 경기도 지방을 순찰하면서 농촌의 참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산 존영〕

 첫 번째 활쏘기 일화는 초계문신 시절 임금이 규장각 신하들에게 베푼 북영(北營)의 활쏘기에서 실력이 저조한 사람은 벌로 열흘 동안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 그 과정과 감회를 세세히 기록한 글이다.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이다. 정조는 활쏘기 실력이 뛰어난 명궁名弓이었다. 두 번째 일화는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洪和輔 절도사가 영조에게 활을 하사받은 일과 정약용이 활을 물려받은 일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홍절도어사각궁기洪節度御賜角弓記』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나 1836년(헌종 2년)에 사망했다. 두 가지 기록을 인용하여 붙인다.
 
 『북영에서 벌로 활쏘기를 연습한 것에 대한 기[北營罰射記]』 

 신해년(1791, 정조 15년) 가을 9월에 성상께서 춘당대(春塘臺)에 나와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에게 웅후(熊帿)를 10순(巡)씩 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신(臣) 약용(若鏞) · 수만(秀晩) · 명연(明淵) · 반(?) · 동만(東萬) · 지렴(知濂) 등은 모두 네 발도 맞추지 못하여 활 쏘는 법에 따라 벌주를 마시게 되었다. 성상께서 말씀하셨다.

 "술을 주는 것은 상이지 벌이 아니다. 문장은 잘 지으면서 활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가 아니니, 마땅히 북영에 잡아 두고 날마다 20순(巡) 쏘게 하여【100발이다.】 1순에 한 발씩은 맞힌 뒤에야 풀어 주어라."

 이에 우리들은【나는 이때 반열 중에 첫 번째였다.】 북영으로 갔다. 처음에는 활이 틀어지고 화살이 굽었으며, 깍지는 떨어지고 활팔찌(활줄이 옷에 닿지 않도록 소매를 걷어 올리는 데 쓰는 띠)는 끌려서 손가락이 부르트고 팔뚝이 부었다. 활을 당기는 것도 서툴러서 구경하는 사람 중에 크게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점점 익숙하게 활시위를 당기게 되어 1순에 3발을 맞히는 경우가 많았다. 성상께서 과녁을 맞힌 화살의 수를 기록한 것을 보시고는 하루에 10순만 쏘고 여가에는 경전의 의리를 연구하라고 명하시면서, 마침내 《시경(詩經)》에 대한 질문 800여 조목을 내리시고 조목별로 대답하여 올리게 하셨다. 그 후 열흘이 지나 활 쏘는 솜씨가 더욱 나아지자, 마침내 북영에서 풀어 주셨다.

 내가 삼가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는 육예(六藝)*3 를 갖추지 못하면 선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회할 적에는 반드시 활쏘기를 하였으니, 삼련(參連)*4 , 백시(白矢)*5  와 같은 것은 누구나 익히던 것이었다. 그런데 후대에는 문(文), 무(武)의 도가 나뉘고 게다가 나라의 풍속이 문(文)을 귀하게 여기고 무(武)를 천하게 여겨 어려서부터 지필(紙筆)만을 익혀 문장과 편지글의 지엽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활을 잡아 보지 않고 늙은 자도 있다.

 지금 우리 몇 사람은 다행히도 성인(정조를 지칭)의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것만으로도 다행인데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며 활쏘기에 참여하여 그 좌우로 당기고 놓는 구별을 대강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어찌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활쏘기를 연습한 기간은 열흘에 불과하였다. 사람으로서 360일 가운데 기꺼이 그 36분의 1을 할애하여 자신의 힘으로 기예를 이루려 하지 않고 성상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억지로 활쏘기를 익혔으니, 이는 또 우리들의 죄이다.
 
 『임금이 홍 절도사에게 하사한 각궁에 대한 기[洪節度御賜角弓記]』 

 나의 장인인 홍 절도사는 비록 무관(武官)으로 등용되었으나 영조께서 만년에 총애한 신하였다. 성상께서 한번은 내원(內苑)에서 공에게 활을 쏘아 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열 발을 쏘았으나 한 발도 맞히지 못하였다. 성상께서 그 활을 가져오게 하여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그대가 잘 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활 탓이로다. 각궁(角弓)은 너무 단단하면 튕기고 너무 부드러우면 틀어지는데, 지금 이 활은 너무 부드러우니 그대가 맞힐 수 있겠는가. 내 활로 말하자면 내가 비록 늙었지만 잘 맞힐 수 있다."

 이에 수염을 묶고 소매를 걷어 활팔찌로 매시고는 공에게 화살을 메게 한 뒤에, 하늘을 향해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다가 멈추어 발사하셨는데, 과녁의 정곡에 맞으니 성상의 낯빛이 크게 환해졌다. 성상께서 공에게 활을 던져 주며 말씀하셨다.

"나는 한 번 맞춘 것으로 충분하다. 쉬는 것을 잘해야 하니*6 , 활은 그대가 받아라."
공이 몸을 굽혀 받고 사례한 뒤에 돌아와 잘 보관하였다. 때때로 활을 쏘기도 하였는데 한 번 맞히고는 쏘기를 멈추었으니, 이는 예전 성상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나는 규장각에 예속되고 난 뒤에 내원에서 활쏘기를 시험 볼 때마다 번번이 적중시키지 못하여 벌을 받았다. 공이 말씀하셨다.
"주상께 하사받은 이 활은 내가 마땅히 대대로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식은 병이 들었으니, 자네가 이것을 받게."
 그러고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는 신출한 활솜씨가 비범하셨고 영조께서도 활을 잘 쏘셨으니, 선왕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도 한 번 적중시키고는 활을 던져 버려서 남에게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셨으니, 이야말로 성인이시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활 만드는 장인을 불러 함께 대화를 나누고 채 깨닫지 못한 활의 이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7 . 그러나 영조께서는 한 번 보고 이 각궁으로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셨으니, 영조의 성지(聖智)가 당 태종보다 뛰어난 것이다. 자네는 부디 이것을 기억하라."

 내가 이 활을 얻은 뒤로 활을 쏠 때마다 몇 발씩을 맞혀서 그동안 받은 상이 많았다. 이에 소중히 보관하고 아울러 활을 얻게 된 전말을 기록하여 장인과 사위가 두 조정의 은혜를 입은 것이 이와 같이 성대하였음을 기록한다.


주석문 ----------
*1.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 서거 후 백 여년이 지나 후학들이 산재되어 있던 정약용의 저서들을 전집의 형태로 묶은 것. 여유당은 정약용의 호 중의 하나다.
*2. 四書는 大學, 論語, 孟子, 中庸이고 三經은 詩經, 書經, 周易이다.
*3. 육예(六藝) 옛날 선비들이 배워서 익혀야 할 여섯 가지 기예로, 예절[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과 글씨[書], 수학[數]이다.
*4. 삼련(參連) 활 쏘는 방법의 하나로, 화살 한 개를 먼저 쏜 다음 이어서 화살 세 개를 연속해서 쏘는 것이다.
*5. 백시(白矢) 화살촉이 과녁을 꿰뚫고 지나가 과녁의 뒤쪽에 하얗게 살촉이 보이는 것을 말한다.
*6. 초(楚)나라의 명궁 양유기(養由基)에게, 지나가는 나그네가 "백발백중의 솜씨라도 그만둘 때를 알아 잘 쉬지 않으면 조금 후에는 기력이 쇠약해져서 활은 휘고 화살은 굽어서 한 발도 맞히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앞서 세운 공도 다 사라지게 된다."라고 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7. 당 태종이 열 개의 좋은 화살을 얻어 화살 장인에게 보여 주었는데, 모두 좋은 화살이 아니라고 하였다. 당 태종이 그 이유를 묻자 "나무의 중심이 단정하지 않으면 결이 비뚤어지니, 이런 나무로 만든 화살은 굳세서 힘이 있기는 하지만 쏘아 보면 화살이 곧게 나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당 태종이 그 말을 듣고 "내가 전쟁으로 천하를 차지하여 화살을 쏜 날이 매우 많은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 활의 이치가 있구나. 더구나 내가 천하를 소유한 날은 화살을 쏜 날보다 더욱 짧으니,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당연히 깨닫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_《정관정요(貞觀政要)》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북영에서 벌로 활쏘기를 연습한 것에 대한 기 [北營罰射記], 임금이 홍 절도사에게 하사한 각궁에 대한 기 [洪節度御賜角弓記] 『여유당전서 - 시문집 (산문) 14권, 김창효,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네이버 지식백과] 초계문신 [抄啓文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희선(서울 화랑정)
기사제공 : 국궁신문
 
 
 

스폰서 링크

 
국궁신문 공식밴드  http://band.us/@archery
전국한량들의 쉼터
 
 
전통활쏘기 연구회  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1957&msection=5&ssection=41
전통활쏘기의 '연구, 학술, 교육, 교류’
 
 
화살, 기념품 판매 영집궁시박물관  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1968&msection=10&ssection=44
육량전, 편전, 통아, 효시, 미니화살, 박두....
 
 
사법고전연구소  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1834&msection=5&ssection=41
한국의 활터문화 연구-고문서, 편액, 주련 등 연구
 
 
성촌리 심곡재-聲村理 尋鵠齋  http://www.sky473.com
활도 국악도 전각도 모다 좋네^^
 
 
네티즌 의견
전체 0   아이디 작성일
 
의견쓰기
 
활 못 쏘는 병조판서
난중일기亂中日記 속의 활
역사 기사목록 보기
 
  역사 주요기사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또 다른 ..
난중일기, 李忠武公의 활쏘기 실..
1900년 전후의 활쏘는 사진!
교자궁의 실체와 각궁계....
조선왕조실록,웅후·미후·시후..
풍속화 2점, 육량궁도와 관무재..
태조 이성계의 활과 화살!
명궁 이성계와 이지란
 
 
인기뉴스
화살길이와 무게에 대한 의견
화살길이와 무게에 대한 의견
김홍도의 활쏘기는 정량궁 사법..
리뷰, 국궁입문필독서
1900년대 초, 활쏘는 광경~
1960년대 활쏘기 동영상
많이 본 포토뉴스
시지를 통해 본 여무사 활 인..
심고만분(審固滿分)
시표는 궁사의 마음
동호정 국궁체험 미국잡지 소..
많이 본 기사
1900년대 초, 활쏘는 광경~
1900년대 초, 활쏘는 광경~
장궁 쏘는 광경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또 다른 ..
1900년 전후의 빛바랜 궁술사진
편전 쏘기, 대회방식

국궁신문 광고문의 이용약관 개인보호취급방침 이메일수집거부 모바일 국궁신문 국궁포토 기사제보 독자투고 회원탈퇴
 
국궁신문 l archerynews@gmail.com l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l 國弓新聞 l www.sky473.com
Copyright(c)2021 국궁신문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