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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못 쏘는 병조판서
열흘 동안 쏘기를 그치지 않고.....
기사입력 2020-11-24 오후 5:21:00 | 최종수정 2021-02-13 오후 5:21:29   
 정조 임금은 명궁으로 활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1777년(정조 원년) 규장각 완공을 기념하는 활쏘기 대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노라 하는 많은 대신들이 참여한 가운데 병조판서이던 채제공蔡濟恭도 함께 활을 쏘았는데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전군 최고 책임자가 임금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자존심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는 본래 문신으로서 당시 병조판서와 규장각 제학提學을 겸직하고 있었다. 이 일을 극복하고 임금으로부터 활을 하사下賜 받은 앞 뒤 사정을 기록한 『사궁기賜弓記』를 살펴본다. 

 채제공은 뛰어난 경륜으로 정조의 개혁을 보필하며 영의정을 지낸 조선시대 명재상 중의 한 분이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을 섬기며 나라의 중흥과 개혁이라는 국정의 중심에서 여러 업적을 남겼다. 당쟁 완화와 탕평 강화, 수원 화성 건설, 대상인의 특권 폐지와 소상인의 상업 활동 보장, 사노비寺奴婢 폐지 기틀 마련 등 조선 후기 왕권 안정과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 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시 도승지였던 채제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다. 훗 날 영조는 이 일에 대해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 정조가 그를 신임하는 까닭이다. 정조 등극시 그의 나이가 56세였다.

〔채제공 73세 때, 정조로 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고
. 보물 제1477-1호.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규장각奎章閣은 정조가 각별히 공들인 곳으로 강학講學과 권력의 중심이었다. 각신閣臣은 6명(提學 2명, 直提學 2명, 直閣 1명, 待敎 1명)이었다. 규장각에서 임금과 각신이 함께 강학하고, 그들에게 술을 내리며 우대하는 모습을 담은 시를 인용한다. 『번암집樊巖集』에 실려있다.

“1781년 춘 삼월에 / ... 아침에 임금님 수레가 원 중에 내려오시니 / ...  시임(현직), 원임(전직) 각신이 열여섯인데 / 동서로 엄숙하게 관복을 차려입고 나열하였네 / 순임금의 음악이 조화롭게 울리고 호명한 뒤 / 배례가 끝나자 책을 끼고 당에 올랐네 / 강론을 마치면 궁궐 주방에서 팔 진미가 나오니 / 은혜로운 술이 하사한 술병에 찰랑 거리네 /... “ 채제공이 한성판윤 시절에 쓴 시다.

〔창덕궁 규장각(우측상단)과 부용지. 
오늘날 규장각은 서울대학교 안에 있다〕

 탕평 정국에서 남인을 대표했던 정치인인 그에게도 고난이 있었다. 정조 임금 초기 임금을 가까이 보필하던 홍국영이 지나친 월권 행사로 실각 당한 후, 그 와의 친분 등의 혐의로 조정 대신들의 상소를 당해 한 때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서울 번동 인근의 산골짜기에 은거하며 시련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왕의 신뢰는 그가 어려운 처지에 있던 이 시절에 잘 나타난다. 규장각 원임 제학이란 직함의 그에게 11월 그믐에 땔감 400근을 하사했다. 다음은 성은에 감격하여 남긴 시다. 

“하늘가의 규장각 / 산골짜기의 노상서老尙書 / 추위가 심해 궁궐이 염려스러운데 / 성은이 막중하여 산속의 안부를 물으시네 / 골짜기에 율관律管(음의 높이를 정하는 관) 소리가 두루 퍼지니 / 주방에 젖은 재가 다시 날리네 / 태평성대의 기상이 분분하여 / 밥 짓는 연기가 외진 마을을 감싸네”

〔번암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 

 이 밖에도 정조가 동짓날에 달력을 보내신 일, 8월에 쌀 네 말을 보낸 일 등 선물을 보내며 신임을 보인 사례가 『번암집』에 실려있다. 체재공이 65세 때는 화가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체재공의 호는 번암樊巖이고 1720년(숙종 46년) 출생하여 1799년(정조 23년) 사망했다. 시문집으로 『번암집』을 남겼고 시풍은 정약용 등에게로 이어졌다. 채제공의 괄목상대刮目相對 『사궁기』를 인용하여 붙인다.

  『사궁기賜弓記』
 활을 쏘는 것은 육예六藝의 하나이다. 어찌 대수롭지 않다고 하겠는가. “나는 태어나서 활 당기는 일을 배우지 않았다.”고 하고자 하지 않음이 아니고,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정유년 봄에 규장각이 낙성되었을 때, 임금이 불운정拂雲亭에 납시어 근신들에게 활을 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나의 직책은 병조판서였다. 불러서 앞에 나오게 하고 함께 활 쏠 것을 명령하였다. 내가 쏜 살은 낮게 떠서 돌아돌아 과녁 있는 데의 반도 못 가서 떨어졌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번 하니 임금이 묵묵히 물러가라고 명령하였다. 이튿날도 또 근신들과 무신들 중에서 활을 잘 쏜다는 이름이 있는 자들에게 활쏘기를  명령하였으나 나를 부르지 않았다. 임금께서는 강요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남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체로 병조판서라는 벼슬은 일만 명의 무사를 관할하는 직책이다. 임금을 앞에서 모실 때에는 반드시 활 주머니를 메고 전동에 화살을 꽂아 짊어진다. 마치 졸지에 황급한 일이라도 있으면 막아 호위할 수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 나는 서생이다. 비록 그러한 복장이 맞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병조판서로서 활쏘기에 참여하지 못하니 마음에 어찌 걸리지 않겠는가. 

 다음날 용호영龍虎營에 나가서 과녁을 설비하게 하고 온종일 활을 쏘았으나 한 발도 맞히지 못했다. 또 다음날도 쏘았으나 온종일 맞는게 없음이 전일과 같았다. 다음날에는 비로서 어쩌다가 간혹 맞는 것이 있었다. 이에 열흘 동안을 쏘기를 그치지 않고 날마다 쉬지 않으니 맞는 것이 대강 반 정도는 되었다. 수십 일이 되니 맞는 것이 많고 맞지 않는 것이 적었다. 

 하루는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납시어 또 근신들에게 활쏘기를 명령하였다. 신도 또한 참여하였다. 그 때 임금께서는 내가 근래에 활쏘기를 익히고 있다는 것을 어슴프레하게 듣고 있었으나 미심쩍어 했다. 그래서 놀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신이 오른손으로 활을 잡고 왼손으로 살을 잡은 채 천천히 걸어나가 사격장(사대)에 섰다. 살 하나를 발사하니 살은 그은 듯이 날아가더니 맞는 소리가 나면서 기가 번쩍 빛나며 오르고 북소리가 두둥둥 크게 울렸다. 임금이 이상하게 여기어 눈동자를 모아 주시하였다. 살이 모두 다섯 개인데 맞힌 것이 네 개 였다. 

 근신들 중에 활 잘 쏜다고 자부하는 자가 임금께 아뢰기를 “청컨대 채모蔡某(채제공)와 승부를 결정하는 내기를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이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드디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쏘게 되었는데 오히려 신보다 더 잘 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종내에는 도리어 살 한 개를 내게 지게 되었다. 임금이 크게 경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사흘이 지나 선비를 보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는 말은 경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나이가 노쇠 한데도 그 재주가 이와 같으니 내 실로 가상하노라.”하고 임금께서 화살 한 개(賜弓記로 봐서 '활 한자루'로 추정)를 집어서 친히 주셨다. 신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 가지고 물러 나왔다. 이 날 좌우에 모시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고쳐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아, 천하의 모든 일은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근심할 뿐이다. 한다면 무엇인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대체로 나는 평생에 활을 당기지 못하던 자로서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열흘 정도의 노력으로써 가장 하등의 우둔하던 솜씨가 상등의 재주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빛나고 존귀한 포상을 받았으니 마음 가운데 얻은 바가 있다. 전일에 내가 활을 쏘지 못한 것은 바로 게으름 때문일 뿐이다. 어찌 재주가 없기 때문이겠는가. 공자가 말씀하기를 “어진 일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린 것이다. 어찌 남에게 달렸겠는가.”라고 하였다. 활쏘는 것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군자가 어진 일을 하는 것을 어찌 심력을 다하여 구하지 않고 남만 못한 것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기록하여 세상의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에게 경계한다. 
사궁기 출처 : 오래된 산문(차마고도 엮음. 2010)
 
양희선(서울 화랑정)
기사제공 : 국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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