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잊지 않는(不忘本) 한량들

입력 : 21.10.18 22:08|수정 : 21.12.07 22:08|국궁신문|댓글 0
울산 반구대에 모이다

뿌리를 잊지 않는(不忘本) 한량들 - 울산 반구대에 모이다
화랑정 김기훈 (2021. 10.18)
2021년 10월 어느 날 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건너편 산록에 모인 일련의 활꾼들이 아래로 흐르는 대곡천변에 마련된 과녁을 향하여 활을 내고 있었다. 누구는 호피를 입고, 누구는 화랑의 깃털을 머리에 꽂고 또 누구는 사또 정장을 하고 있다. 각궁 죽시도 있고 카본 궁시도 보인다. 그 옆에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세 대의 카메라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 
 
저들은 누구이고, 왜 저 자리에 모여서 저런 모습으로 활을 내고 있을까. 옆에 걸린 현수막에 자신들의 의중을 표하고 있다. “한민족 활의 기원 찾기 반구대 활쏘기 재연행사”이다.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있는 이들은 우리민족 활의 기원 찾기에 뜻을 모은 울산 반구대 현지의 궁도인들과 이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 내려온 활꾼들이라 한다. 
 
이들이 하필 여기에 모인 까닭은 무엇인가? 대곡천 반구대 부근에서 고래와 육지 동물들을 사냥하는 바위그림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도 유명하여 한국인이면 적어도 이름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것은 1971년 12월 말이었으니 딱 50년 전 일이다. 그동안 숫한 전문가, 애호가들이 연구하고, 보호운동을 전개하여 왔고, 고래 모양의 박물관도 건립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암각화를 실제 모습과 똑같이 재현한 벽면이 있다. 실제 현장에서 암각화를 보았을 때는 보일 듯 말듯 하던 그림들이 이 벽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오늘 여기에 모인 한량들이 이 수렵 암벽화 속의 활을 쏘는 사냥꾼을 의식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이들도 처음에는 우리 민족의 고대 활쏘기를 상징하는 것은 천 오백여 년 전 만주 집안현 무영총 벽화 속에 등장하는 수렵도 정도로 알고 있었다. 반주를 곁들인 뒷풀이는 때로는 한량들의 역사문화 토론장이다. 그런 뒷풀이를 하던 어느 날, 최근에 언양 고헌정에서 궁도에 입문한 집청정 주인장이 ‘그게 아닌데’ 하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반구대 암각화 속에 활을 쏘는 그림이 있고, 그것은 7천 년 전 암각화라는 사실을 동료 한량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이 때부터였다. 그 사실에 공감한 언양 고헌정 궁사들이 우리민족의 활의 기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반구대 재연행사’는 그 뒷풀이에서 촉발된 고헌정 한량들의 ‘우리 활 역사 바로 찾기 운동’의 첫 결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이중화의 『조선의 궁술』(1929)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들짐승을 사냥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그 뼈를 가지고 일용 도구로 사용하였던 고대인에게 궁시가 가장 중요한 무기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중화 선생이 안타깝게 여긴 것은 그 사실을 증명하는 화살촉은 만주에서 경상도 경주까지 전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활의 유물은 발견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활이 썩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전체 모습을 짐작할 정도의 활 유물이 발견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에 현실적으로 그림 유적은 유물을 대신하는 거의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활을 든 사냥꾼을 묘사한 반구대 암각화는 칠천년 전의 활 유물에 준하는 증거력을 지닌다. 이제는 더 이상 화살촉으로 활의 존재를 유추하던 간접적인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 직접 한반도 활의 역사를 최소한 신석기 시대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에 한민족 활쏘기 기원의 상징물을 반구대 수렵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언양 고헌정의 한량들의 주장은 확실한 근거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왜 ‘기원’ 찾기에 그리 열성적으로 움직이게 되었을까. 역사적으로 더 오랜 옛날에 우리 활이 시작되었다는 점, 그 시작 공간이 울산이라는 점 등에 대한 자부심이 아마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울산이 아닌 곳의 한량들도 공감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 마음 밑바닥에 존재하는 뿌리에 대한 본능적인 숭상하는 마음이다. 일백 이십여 년 전 민영환은 황학정 사계를 중수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병기가 발달한 시절에 ‘왜 활쏘기를 하려는가‘라고  자문하고 그것은 뿌리를 잊지 않고, 뿌리를 존중하려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제사를 지낼 때 정화수[玄酒]한 그릇을 꼭 바치는 마음이라고 비유하였다. 술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을 때는 제사에 정화수를 올렸다. 그후 술을 빚을 수 있게 된 시절이 되었지만, 제사상 한 켠에 아침 일찍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맑은 물 – 정화수 한 그릇을 꼭 올렸다. 옛날을 잊지 않고 존중하는 마음의 표시이며, 지극한 정성의 표현이었다. 울산 반구대에 모인 한량들도 이런 마음이었지 않을까 생각하며, 민영환의 사계 서문 한 구절을 바친다. 
 
 “그런데 수백 년 이래 해외 여러 나라들은 총포를 만드는 기술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세계를 거리낌 없이 횡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총포를 발사하면 번번이 산들이 무너지고 바다가 솟구쳐 오르며 귀신들도 놀라 도망갈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궁시의 효용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때에 나와 동지들은 사계(射契)를 중수(重修)하고 빈 땅에 나아가 서까래 몇 개를 엮어 집을 지었는데 황학정(黃鶴亭)이 바로 그것이다.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옥과 산호로 만든 훌륭한 제기를 사용하면서도 반드시 맑은 정화수 (玄酒) 한 그릇을 바치는 것은 원래의 뿌리를 잃지 않으려함(不忘本)이다. 크고 발전된 총포를 사용하면서도 궁시를 겸용하려는 것 또한 원래의 뿌리를 숭상함(尙本)이라 일컬을 수 있다.”(황학정 사계 서문, 1899)
 
[반구대 암각화 모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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