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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영양현, 문월당 오극성 선생의 사계서(射稧序)

입력 : 22.05.29 07:33|수정 : 22.05.29 07:33|국궁신문|댓글 0
영남북부지역의 한국전통궁술조직 연구에 중요한 자료
영양지역 무인들의 뛰어난 활쏘기 실력에 대한 기록

1593년 영양현, 문월당 오극성 선생의 사계서()
영남북부지역의 한국전통궁술조직 연구에 중요한 자료
영양지역 무인들의 뛰어난 활쏘기 실력에 대한 기록
 
소개되는 자료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오극성(吳克成)의 시문집 초간본에 있는 사계서()에 관한 글이며, 조선시대 궁술조직인 사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네이버 블로그 英山에 등록된 1593년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선생이 조직한 활쏘기계(射稧)’ 을 블로그 운영자의 허락을 받고 전문을 전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1593년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선생이 조직한 활쏘기계(射稧)’
별들이 2022. 5. 2. 15:44
URL: https://blog.naver.com/yjmuse1/222718453453
 

김홍도의 <풍속화첩> 활쏘기
 
향사례(鄕射禮)는 주()나라 때에 지방의 교육기관인 향학(鄕學)에서 3년의 수업을 마친 사람 중에서 현자(賢者)와 능자(能者)를 선발하여 임금에게 추천할 때 채택했던 과목 중의 하나였다. , 활쏘기는 고대 중국에서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그리고 계산[]으로 구성된 6가지 기본적인 교육인 육예(六藝)였다.


20세기 초 사진엽서의 활쏘기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던 한국 또한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했던 조선에 의해서 향사례를 법전과 예서에 수록함으로써 공식적인 의식으로 확립되었다. 조선의 향사례는 매년 봄인 33일과 가을인 99일에 군현 단위로 학당 근처에서 일정한 의례에 따라 활발하게 행해졌다.
 



20세기 초 사진엽서의 국궁경기

이처럼 활쏘기는 기본 교육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춘 양반가의 여성 또한 활쏘기를 익혀서 여성들끼리 서로 기량을 겨루며 즐겼다
. 여성의 경우 교육기관 3년 수료생이라는 참가 자격을 갖출 수 없었기 때문에 향사례에 나아갈 수는 없었다.

 
정신과 육체를 수양하는 좋은 방법으로서 활쏘기의 전통은 조선의 건국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조선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영양현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폐현되어 영해부(寧海府)의 속현이 되었으며, 1577년에 영산서당(英山書堂)이 창건되었지만 향사례를 주관할 상황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영양현의 향사례는 공식적으로 1682년 영양현이 복설된 이후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있었다. , 영양현이 복설되기 이전까지 영해부에서실시되는 향사례와 무과(武科)를 통해서 영양지역의 무인들은 뛰어난 활쏘기 기술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吳時俊 光俊之第 登嘉靖壬戌別試第一才顯朝廷 名滿一國 訓鍊院立遠射之碑 至今猶存
오시준은 광준의 동생으로 가정 임술년(1562) 별시에서 1등으로 등과하여 재능을 조정에서 나타냄으로써 이름이 한 나라에 가득했다. 훈련원에 원사비를 세웠으며 지금도 남아 있다.
 
영양지역에서 활쏘기로 유명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영양읍 감천리에 세거했던 낙안오씨 가문의 칠원공(漆原公) 오시준(吳時俊, 1527~1613) 선생이다. 활을 얼마나 잘 쏘았던지 위에서 보듯 무예로 이름을 알림은 물론 특별히 훈련원에 '원사비(遠射碑)'를 세울 정도였다.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의 활쏘기계 서문

문월당
(問月堂) 오극성(吳克成, 1559~1617) 선생이 쓴 '활쏘기 계의 서문[]' 에 의하면 영양지역 무인들의 활쏘기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 문월당 선생은 활쏘기 계의 서문에 '속담에 무사는 반드시 영양현을 일컸는다[鄙言武弁 必稱英縣]' 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영양지역과 관련된 선비의 문집을 살펴보던 중 문월당 선생의 문집에서 위의 글을 찾게 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 위의 글은 목판본으로 발간된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에는 실리지 못했다. 위의 서문은 목판본을 발간하기 위해서 편찬한 초간본에 실린 것이다.
 
서문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숨어서 급기야 활쏘기가 폐지되었는데, 문월당 선생은 활쏘기야 말로 나라가 위급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되살려야 할 교육으로 여겼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벗과 더불어 1593년 겨울에 직접 과녁을 설치하며 활쏘기 계를 조직하게 되었다.
 
문월당 선생이 다시 조직한 활쏘기 계회는 이듬해 무과에 합격하여 전쟁에 나아감으로써 이어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중기 활쏘기로 전국에 유명했던 영양지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에 원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射稧序 癸巳
我英縣介處山谷 而在昔盛時 武夫干城之才菀然而興 或守衞禁闥 或擁節邊 鄙言武弁 必稱英縣 自兵亂以來 竄逐分散 邑里蕭條 鄉射之禮 遂廢不講 余所以慨然者 此也 迺於癸巳冬 與一二同志 設侯鵠 調弓矢 肄業而 修楔焉 夫射者六藝之一也 心正而後矢正 矢正而後發 無不中 衆耦之升降 豐觸之取飲 雍容揖 遜其争也 君 子則射之設 豈偶然哉 矮今海寇充斥 泥露我君父 糜爛 我生靈 此政沫血飲泣 焉國家殉身之日也 凡我同盟之 人 盍亦精透妙技 各勵忠憤 思所以一矢復命哉 書此以爲射稧序
 
활쏘기계 서문(射稧序) 계사년(1593)
우리 영양현(英陽縣)은 산과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옛날 나라가 태평할 때에도 무인은 간성(干城)의 자질이 완연하고 흥했다. 그래서 혹은 대궐 문을 지키고, 혹은 변방을 지켰기 때문에 속담에 무사는 반드시 영양현을 일컬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후 사람들이 흩어져서 숨음에 따라 고을과 마을이 쓸쓸해져서 향사례가 폐지되어 익히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개탄하는 바였다. 이에 계사년(1593) 겨울 뜻을 같이하는 한 두 명과 더불어 과녁과 정곡을 설치하고, 활과 화살을 조율하여 익히며 계를 만들었다.
 
대저 활쏘기는 6가지 기예(예절, 음악, 활쏘기, 말 타기, 글쓰기, 셈하기) 중의 하나이다. 마음을 바르게 한 뒤 화살을 바르게 하고, 화살을 바르게 한 뒤 쏘면 가운데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짝을 지은 여러 패가 오르내리고,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마시고, 온화한 얼굴로 인사하고, 그 경쟁에서는 겸손하니 군자가 향사례를 설치함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물며 지금 왜구가 가득차서 우리 임금께서 어려움에 처해 계시고, 우리 백성들은 문드러져 정사가 피눈물을 삼키고 있으니 나라에 몸을 바칠 날이다. 무릇 나와 함께 맹세한 사람이 또한 정밀하고 뛰어난 묘한 기술로 각각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난 분노를 일으켜 한 화살로 돌아와 복명함을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활쏘기 계의 서문으로 쓴다.
 
 
위 글은 조선시대 궁술조직인 사계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계서를 소개하는 자료로 블로그 글을 전재하도록 허락 해 주신 별들이님께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원문정보
1593년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선생이 조직한 활쏘기계(射稧)’
별들이 2022. 5. 2. 15:44
URL: https://blog.naver.com/yjmuse1/222718453453
 
블로그 https://blog.naver.com/yjmus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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