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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자궁의 실체와 각궁계....
-국역비변사등록
기사입력 2010-06-21 오후 12:38:00 | 최종수정 2010-06-21 12:38   
2009-01-03

국역비변사등록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그 동안 각종 실록과 고도서에 자주 등장하는 교자궁(絞子弓)이 어떤 것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궁금했는데 소개되는 자료에는 교자궁 제작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아울러 각궁이 일상생활에서 아주 많은 사용을 했다는 반증 자료인 각궁계 조직의 폐단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국궁신문】


영조 1년(1725년) 12월 8일
左議政 閔鎭遠 등이 입시하여 各弓의 특징을 살피고 唐角의 구입을 위해 北京에 奏文을 보내는 일과 倭角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

이 달 3일 대신과 2품 이상 및 삼사에서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을 때에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군기(軍器) 중에서는 각궁(角弓)이 가장 긴요한데 근래에는 왜각(倭角)이 지극히 귀하여 내궁방(內弓房)에서 활을 만드는 일을 중단하였고 각 군문이나 영문에서도 모두 활을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이 일은 관계된 바가 적지 않습니다. 신축년(辛丑年: 경종 1, 1721 )에 흑각(黑角)을 사겠다는 뜻으로 북경에 자문(咨文)을 보내려고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올 봄에 신이 다시 진달하여 표류인을 압송하는 재자관(?咨官)의 행차에 자문을 부쳐보냈더니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통역관들의 말을 듣건대 예부상서(禮部尙書)란 자가 말하기를 ‘자문은 일의 성격이 다소 가벼우니 만일 주문(奏文)으로 작성해 온다면 내가 의당 주선하여 허가를 받게 해주겠다’ 하였고, 김상명(金常明)은 말하기를 ‘예부에서 혹 방계(防啓: 저지하는 계사를 올림 )하더라도 내가 잘 주달하여 특명을 받아내겠다’ 하였답니다. 이번에 동지사(冬至使)가 들어갈 때에 이 일로 주달하려 하였으나 봉전(封典)의 일이 소중한데 겨우 받아주도록 주선하였으면 그 외에 다른 일로 주청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이번의 사은사(謝恩使)는 달리 중요한 것이 없으니, 주문을 작성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 일은 중대한 일인데 비국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열지 못했기 때문에 제재(諸宰)들과 상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입시한 제신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군기 중에서는 활이 가장 긴요한데 당각(唐角)은 비록 사온다 하더라도 도리어 왜각(倭角)만 못하니 도움이 안된다. 당각과 왜각의 편리함은 어떠한가? 사은사의 행차에 주문을 보내는 일은 입시한 제신이 진달하고 각궁의 편리 여부는 입시한 무신(武臣)으로 하여금 진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조판서 이의현(李宜顯)은 아뢰기를

“김상명이란 자가 기왕 주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니 대신이 진달한대로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좌참찬 이병상(李秉常)은 아뢰기를

“당각과 왜각의 우열(優劣)은 신이 비록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설사 당각이 왜각보다 다소 낫다고 하더라도 이 일로써 주문을 보낸다는 것은 실로 중대한 일입니다. 또 근래에 우리 나라가 모든 일을 김상명의 주선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비록 다행한 일인 듯하오나 듣건대 김상명은 총행(寵倖)이 비길 데 없어 사람들이 모두 언짢게 보고 있다 합니다. 예로부터 총행을 받은 신하치고 패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한번 패한 뒤에 혹 사사로이 상통한 형적이 탄로난다면 그 염려가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 돌아온 주청 사신도 이런 뜻으로 진달하여 이 뒤로는 간청(干請)하는 일에 더 조심하고 비밀스럽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중대하고 부득이한 일 이외의 이런 따위의 사사로운 부탁은 구태여 할 것이 없을 듯하니다.”

하며, 대사성 홍석보(洪錫輔)는 아뢰기를

“감히 비국 당상의 신분으로서 대답할 수는 없사옵고 신이 호남을 맡았을 때에 보고 아는 바로는 각읍진(邑鎭)이 흑각궁(黑角弓)은 불에 지피지 않으면 쓸 수가 없어 도리어 교자궁(交子弓)만도 못하기 때문에 장계를 올렸더니 그때 비국의 복계에서 신의 말을 채용하였습니다. 그 뒤에 흑각궁의 말이 어느 때에 다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가불 비국으로 하여금 먼저 그 변통한 곡절을 강구하여 처리하게 할 일입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흑각궁은 화살의 힘은 교자궁보다 약간 낫지만 오래 불을 지피지 않으면 상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군기를 유치(留置)하기에는 교자궁이 나을 것 같기에 신이 호남을 맡고 있을 때에 군기 중에서 흑각궁으로 상하고 망가진 것은 모두 교자궁으로 대체하자고 청하였으나 묘당에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흑각궁이 으뜸이고 교자궁이 다음이라면 어찌 흑각궁을 폐하겠는가? 그러나 교자궁도 산성(山城)에서는 쓸 수 있을 것이니 중신이 그 편리 여부(與否)에 대하여 진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우윤 황귀하가 아뢰기를

“주문(奏文)은 중대한 일입니다.”

하고, 대사헌 이교악(李喬岳)도 아뢰기를

“주문은 중대한 일입니다.”

하였다. 부총관(副摠管) 정찬술(鄭纘述)이 아뢰기를

“제신들은 교자궁이 흑각궁보다 낫다고 말하나 신이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익혀 궁시(弓矢)의 묘리에 대하여 대충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교자궁이란 향각(鄕角) 몇 치[數寸] 길이의 어린간각(魚鱗間角)에 나무로써 그 뒤에 붙인 것인데, 만일 불을 잘 지피지 못하면 내부에서 병통이 생기므로 결코 변고에 대비하는 병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넓고 두꺼운 뿔로 잘 장궁(長弓)을 만든다면 그 병통없음과 시도(矢道)의 평원(平遠)이 어떻게 교자궁과 비교하여 말하겠습니까? 신이 선천(宣川)을 맡고 있을 때에 당각을 사다가 활을 만들어 장교들로 하여금 시험해보게 하였더니 유연(柔軟)하고 질긴 것은 왜각만 못하였지만 시도의 원근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변고에 대비하는 활은 날마다 사사로이 연습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만일 왜각이 없다면 당각을 대용해도 무방합니다. 신이 일본에 갔을 때에 흑각이 많이 있었으나 내놓고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들으니 우리나라 사람이 그 이익을 독점하려고 하여 계(契)를 만들어 각궁계(角弓契)라 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흑각의 값이 전보다 갑절이나 떨어졌는데 이 때문에 왜인이 애당초 흑각을 싣고 오지 않았다 합니다. 지금 만일 그 각궁계를 혁파하고 각 영문으로 하여금 전처럼 자유롭게 매매하게 한다면 흑각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고, 부호군 홍원익(洪元益)이 아뢰기를

“소신의 의견도 정찬술이 진달한 바와 대략 차이가 없습니다. 교자궁은 비록 편리하지는 못하지만 흑각궁도 편폐(偏廢)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교자궁은 간각(間角)을 붙이고 또 교자(交子)를 붙여 아교(阿膠)가 들어감이 배나 많으니 불을 잘 지피지 못하면 병통이 생겨 부숴지고 상할 것은 필연의 이치이므로 흑각궁의 견실하고 강한 것만은 같지 못합니다. 당각은 품질이 다소 부드러운 것 같다고 말하나 신이 관서의 고을을 맡고 있을 때에 군기시(軍器寺)에서 사서 써 보니 그 품질의 좋음이 왜각과 그리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군기의 소중함을 들어 말하였기 때문에 이렇듯 하문이 있게 되었으나 이번 사은사의 행차에 또 주청까지 겸하는 것은 타당치 못함이 있다. 또 중신의 말이 옳으니 부득이한 일을 제외하고는 우리 나라가 비록 국력은 미약하나마 어떻게 저들에게 사사로이 청탁을 하겠는가? 정찬술이 말한 왜각에 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하매, 민진원이 아뢰기를

“왜국에는 흑각이 과연 많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 각계(角契)를 하는 사람이 있어 그 이익을 독점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매매의 길이 매우 좁아져 많이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과연 정찬술의 말과 같다면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호조로 하여금 그 실상을 조사하여 변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해괴하다. 진달한 바대로 사문(査問)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찬술은 어느 해에 일본에 갔던가?”

하매, 정찬술이 아뢰기를

“신묘년(辛卯年: 숙종 37, 1711 )에 갔다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후에도 또 갔다 온 사람이 있을 터이니 왜국의 실상을 다시 물어보아 처리하겠다.”

하였다.

 

 원천자료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 형태별> 편년자료> 국역비변사등록 > 영조 > 1725년 12월 > 8일

【국역비변사등록 2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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