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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활쏘기의 아버지 성문영
조선궁술연구회 초대회장
기사입력 2010-06-14 오후 9:47:00 | 최종수정 2010-06-14 21:47   

2001-07-24

근대 활쏘기의 아버지 성문영(成文永)


온깍지 궁사회 홈페이지의 사랑방 코너에 가면 눈에 띄는 제목의 메뉴가 보인다. 다름아닌 명무열전(名武列傳)이 그것이다. 명무열전은 조선의 궁술에 나온 역대의 선사편에 대한 연속성을 갖고 있는 국궁사의 소중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특히 5개 항목 이상의 객관적인 평가기준으로 선정되는 명무열전은 국궁사의 공백이 있는 1920년대에서 입승단제도가 도입된 1970년대 초를 대상으로 작성되기에 더욱 돋보이는 코너이며, 매우 의미있는 자료이다.
명무열전 코너의 개설사와 함께 최초로 완성된 조선궁술회 초대회장인 성문영의 이야기를 소개한다.[국랑]

열전이란 "사기"에서 처음 쓰인 말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일생을 간단히 정리하여 후세인들이 본보기로 삼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중략.....우리는 활에 능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역대로 훌륭한 명궁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한 인물들의 활쏘기 모습을 통해서 진정 활량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궁술"에서는 책의 뒷부분에 '역대의 선사'라는 절을 따로 두어 옛날부터 그 책을 펴던 당시인 1920년대까지 활을 잘 쏜 것으로 이름난 인물들의 일생을 간단하게나마 기록하여 후대인들이 잘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중략....."조선의 궁술"에서 기록한 1920년대부터 명궁 제도가 시행된 1970년대 초까지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활을 잘 쏘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나 구전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시대를 산 사람들도 몇 명 남지 않아서 과연 이 '비어있는' 시대에 누가 활로 이름을 떨쳤는지 알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이 열전은 당연히 문헌상, 역사상의 공백으로 남은 이 시기를  택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온깍지 궁사회 홈페이지의 명무열전 코너 개설사에서>

근대 활쏘기의 아버지 성 문 영(成文永)

성문영(成文永)은 호가 운로(雲老)요 관향은 창녕(昌寧)이다. 1870년 7월 4일 서울에서 중추원 의관 기호(起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의 나이 15세 되던 1884년에 집궁하였고, 21세 때 무과에 응시하여 장충단에서 여섯 달 동안 치루어진 회시(會試)에서 장원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화포의 발달로 군대의 무기체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 갑오년의 군무  개혁 때에는 활쏘기가 무과에서 폐지된 까닭에 실로 수천 년을 면면히 이어오던 궁예(弓藝)가 하루 아침에 쇠락하던 때였다. 이러한 위태로운 때에 조선의 무예를 대표하던 활쏘기는 공으로부터 다시 살아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당시 조선은 쇠퇴해가는 중에도 세계 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독일도 그 중의 한 나라였다. 기해년(1899)에 독일의 하인리히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황제였던 고종에게 조선의 고유한 무술을 보고 싶다고 하였고, 황제는 곧 활쏘기를 추천하였다. 곧 이어 장안에서 이름난 여섯 궁수를 경복궁으로 불러 그 옛날 무사들이 시사를 하던 중일각(中一閣)에서 시범을 보이었는데 여섯 사람 모두 한 순에 4중과 몰기를 거듭하였다. 이에 독일 황태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뿐더러 몸소 활을 쏘아 보기도 하였는데, 연달아 50시를 쏜 끝에 50시째 이르러 과녁을 맞추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황태자가 다른 행사에 참가한 시간은 5분 안팎이었을 뿐인데 이날 활쏘기 구경에서는 반 나절도 더 머물렀으니, 그의 관심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크게 고무된 고종황제는 활쏘기가 무과에서는 폐지되었으나 조선의 얼인 만큼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장려하라는 윤음을 내렸고, 경희궁 북쪽 기슭에 활터를 새로이 지어 황학정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역대 왕들이 몸소 활을 쏘던 오운정(五雲亭)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중에 순종이 되는 조선의 황태자가 총재가 되고 공이 우궁수가 되었으니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시들어가던 전국의 사정은 일시에 우후죽순처럼 흥기하여 마침내 조선의 궁술이 다시 크게 일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면서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그것은 활쏘기를 주도하던 주체가 사라진 까닭이다. 한일합병과 더불어 조선은 점차 일본으로 변해갔고, 활쏘기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전국의 활량들이 조선의 궁술을 지키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1928년에 결성된 조선궁술연구회였다.

  조선궁술연구회가 출범한 이듬해인 1929년에는 오천년 조선 궁술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 이루어졌다. "조선의 궁술" 발간이 그것이다. 나라는 망하고 강토는 일본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전통 활쏘기는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시기에 활쏘기의 올바른 모습을 영원히 보전하는 방법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일 따름이었다. 바로 그와 같은 명석한 판단으로 서울과 경기 일원의 활량들이 공을 들여 오천년을 이어온 활쏘기의 본모습을 책 한 권에 담았으니 조선 활쏘기의 정수와 정신을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전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늘 공이 있었으니, 실로 공이야말로 조선 활쏘기의 정통 적자이면서 근대 활쏘기의 아버지라 할 만하였다.

  1928년부터 서울 황학정의 사두가 되었는데 이때는 나라가 망하고 유일한 독립청원이었던 3.1운동도 실패로 돌아간 직후여서 우리 민족에게는 가장 암울한 나날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공은 수사정의 수장이 되어 전조선궁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면면한 전통을 지닌 풍속과 사예(射藝)가 끊어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

  공은 조선 왕실의 엄비(嚴妃) 집안과는 사돈지간이었는데 무과에 장원급제한 까닭에 벼슬이 정삼품훈육등통정대부중추원의관(正三品勳六等通政大夫中樞院議官)까지 올랐다. 그러나 정치보다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호남철도부설권을 따내기도 하였으며,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상공회의소 부회두를 지냈고, 한성은행 감사역과 조선상업은행 취체역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렇듯 실업계에 끼친 공로가 적지 않아 우리나라 실업사상 당좌수표(어음)를 처음 거래한 사례로 기록되기도 하였고, 해방 직후에는 실업계의 원로로서 경제인 모임의 임시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4년 여름에 집궁회갑을 맞았다. 황학정에서는 일제 패망 직전의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조촐한 잔치를 벌여 그 날을 기리었으니, 이는 어려운 시기에 활쏘기를 지킨 공의 공덕에 견주면 실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이 또한 나라 잃은 까닭이었으니,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나라 복이라는 옛말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이라 할 것이다.

  공은 좌궁이고 키가 175cm 안팎으로 당시로는 큰 편이었으며,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체집으로 몸가짐이 아주 바르고 풍채가 좋았다. 젊어서는 강궁을 썼으나 늘그막에는 장궁방의 연상급 활을 썼고 화살은 엿 돈 닷 푼에 평작(平酌)을 썼다.

   1947년 12월 14일, 격동기 한겨레의 활쏘기와 운명을 함께 하던 조선 궁술사의 큰 별이 떨어졌으니, 입산(入山)하였을 때 공의 나이 78세였다.  

[주1] 주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명무에 대한 자료나 이야기를 아시는 분은 온깍지 궁사회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이야기가 국궁사를 크게 만들어 갑니다.
[주2] 온깍지 궁사회 http://www.onkagzy.com/의 왼쪽메뉴 사랑방 코너에 가시면 명무열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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